아내의 침대
면도하다 말고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쓱쓱 깎아냈다. 이발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구레나룻은 금세 자라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면서 머리카락은 점점 얇아지고 굽실거렸다. 현직에 있을 때부터 다니던 미용실은 내 스타일을 딱 알아서 손봐주었지만 서울로 온 지금, 그 미용실 사장님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이발을 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지만 늘 신통치 않다. 이제 귀밑머리쯤은 그래서 내가 스스로 깎는다. 머리카락이 굽실거리니 뭐 반듯하게 딱 맞게 자르지 않아도 된다. 대충 귀 옆에 제멋대로 자란 놈들을 줄지어 눕혀놓고 중간쯤 길이를 생각하며 쓱 깎아내면 그뿐이다. 내 삶도 이제는 반듯하게 살지 않고 대충 삐뚤빼뚤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소심한 배포로 요즘은 그렇게 스스로 귀밑머리를 툭툭 쓱쓱 쳐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예쁜 애님의 날것 같이 파닥거리는 일기를 몰래 훔쳐보며, 어쩌면 변태 같을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혼자 지방에 내려가 살 때도 가끔씩 과한 친절을 베푸는 여직원들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30년 전 와이프와의 사랑이 내 생애 마지막 사랑이라는 신념으로 심장이 식어버린 양철 나무꾼처럼 차가운 빈껍데기로 지냈었다.
하지만 지금, 예쁜 애의 일기를 읽으면서 내 심장은 차츰 말랑해지는 기분이다. 내 모든 일상이 날아갈 것 같이 가볍다.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녀와 뒷짐 지고 뒷산을 나란히 등반하기도 하고, 늦은 아침이면 브런치카페에서 한가하게 커피를 한잔 하기도 하고, 그녀와 같이 고양이 예방접종을 하러 다녔다.
늘 그녀가 먼저 연락이 왔다. 그리고 하루종일 나는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어느새 그녀가 조금씩 내 삶에 깊숙이 들어오게 된 것 같았다. 두렵고 겁이 났지만 달콤했다.
퇴직 후 한동안은 하루를 텅 비운채 지냈었다. 퇴직하고 숲해설가가 되기 전까지 내 하루는 아무런 계획과 의미가 되어줄 일상의 것들을 텅 비운 채 그렇게 지내왔었다. 아내와의 시간은 겨우 집을 드나들면서 오고 가며 뒷모습, 아니면 목소리, 아니면 인기척으로 대신했다.
외출하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지는 않나 싶어 안절부절 조바심이 나거나, 아니면 나도 모르게 설레는 것 같다. 안 버려도 되는 쓰레기를 굳이 버린다며 한밤중에 나가기도 하고, 소화가 안된다며 괜히 집 앞으로 혼자 슬쩍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면서 요가를 따라 하는 아내는 목이 반쯤 꺾인 자세로 갔다 오라며 내게 손짓을 했다. 저 멀리서 그녀의 차라도 지나치면 괜스레 그녀가 타고 있을 엘리베이터를 기대했다.
방금 그녀의 차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타고 올 엘리베이터를 건들건들 기다렸다. 마치 이제 막 짝사랑을 시작한 소년처럼 그녀의 일기장을 생각하면 피가 어딘가로 쏠리고, 또 그러면 얼굴까지 자동으로 붉어진다. 미칠 노릇이다. 별 일 아니고, 별 사람 아니고, 스쳐 지나갈 지인 정도라 생각하지만 무슨 병에 걸린 것처럼 자꾸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고, 심할 때는 혈압까지 오르는 것 같다. 현기증이 나니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내 머릿속에 이제 90%쯤 채워져 버렸다.
땡,
지하주차장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내가 서있는 1층에서 땡소리를 내며 멈춰 열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땡소리와 함께 나는 현실세계로 각성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그녀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늘어난 후드티에 반바지를 입고 사내아이처럼 서있는 그녀 뒤에 멀대같이 큰 놈이 그녀의 목을 휘어 감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표정을 보지 않았다면 그건 마치 강도 현장처럼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세상 나른한 듯 보였다. 다만 힘줄이 사납게 솟아오른 팔뚝으로 터질듯한 장바구니를 쥐고 서있는 그놈의 혈관만 파닥파닥 바쁘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깟 장바구니 하나 드는데 저렇게 온 힘을 다 주는 모습을 보며 괜한 콧방귀가 나왔다. 장바구니에는 빼꼼히 삐져나온 파 한 단과 달걀, 우유, 딸기, 과자 부스러기 그런 게 들어있는 것 같은데, 어찌 됐건 달달하기만 한 그들의 장바구니를 곁눈질로 훔쳐보니 웬일인지 씁쓸했고 질투심에 미쳐 돌아버릴 듯했다.
나는 뒷짐을 지고 근엄함을 장착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하는 그녀에게 대꾸 없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불청객이라도 된 듯 나는 7층을 사납게 중지손가락 마디로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놈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검은 융단 같은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은 맑고 건강한 동정녀의 탱글탱글한 그것처럼 반짝였다. 다시 또 내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경직된 얼굴을 보며 마스크를 눈밑까지 올리고 애써 태연한 척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숫자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식탁에 앉아서 시리얼에 말간 저지방 우유를 말아먹는 아내가 보였다. 정말 말간 우유처럼 말간 눈으로 <투자의 기술> 책이나 훑고 있는 아내를 보니 여자를 안고 싶어졌다. 나는 식탁의자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있는 아내의 덧신을 벗기며 말했다.
- 여보, 한번 안아보자.
나는 빨개진 눈으로 아내의 식탁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내의 배에 머리를 파묻었다. 진한 화장품 냄새가 순식간에 콧속을 지나 내 심장을 지나 내 아랫도리로 돌진했다. 고개를 들어 정말 오랜만에 나는 아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내의 입술에서는 말간 우유 냄새가 났다. 내 등을 토닥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아내를 데리고 아내의 침대로 가 아내를 눕혔다. 눈을 감고 있으니 아내는 어느새 예쁜 애가 되어 내 품에 안겨 고양이 소리를 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