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00% 허구로 지어진 단편소설임을 밝힙니다.
단 하루도 두발 쭉 펴고 잠을 자지 못한다. 그 넓고 푹신한 호텔식 침구가 깔린 침대에서도 매번 새우처럼 웅크리고 무릎을 가슴팍에 단단히 껴놓고 잠이 든다. 잠든 내내 끊임없이 쫓기는 꿈을 꾸고, 어딘가를 찾아 헤매고 돌아다니고, 결국 길을 잃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꿈을 꾼다. 거대한 수레바퀴에 압도당하는 꿈을 꾼다.
민식은 늦은 아침에 뚝딱거리는 주방 소리에 잠이 깼다. 실눈을 뜨고 침대 맡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살폈다. 10:51:12 오늘은 드디어 히든을 만나는 날이다. 민식은 한동안 히든과 통화를 하며 가까워졌고, 드디어 한번 보자는 약속을 했었다. 히든은 다른 어린 후배들처럼 민식을 어려워하지도 않았고, 잠 못 드는 밤에 연락하는 민식의 얘기에 따박따박 조언을 하거나 발칙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 민식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민식은 그런 히든에게 너그러웠다. 그리고 매번 히든 앞에 발가벗겨진 가여운 어린 촌뜨기가 되어 허우적댔다.
민식은 늦은 아침으로 손맛 좋은 메이드가 차려놓은 우육탕 한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면도를 할 예정이다. 일주일째 깍지 않은 민식의 수염이 윗입술을 삐죽빼죽 덮고 있었다. 밤새 잠을 설쳤더니 눈가가 퀭하다.
먼저 뒹글거리던 잠옷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샤워기 앞에 섰다. 역시 부풀었던 뱃살로 아랫도리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배에 있는 힘껏 힘을 주며 숨어있는 복근을 찾아보았다. 배에 힘을 주니 저절로 가슴이 부풀었다.
온수를 세게 틀어 물 온도를 맞추고, 머리를 적셔 이마 뒤로 젖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악마를 보았다>의 경철이 보였다가 <파이란>의 강재가 보인다. 민식은 샤워기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물줄기가 민식의 이마와 콧날과 입술에 부딪혀 거품을 내며 새로운 여러 개의 물줄기로 <올드보이>의 오대수를 만들었다.
민식은 콧노래를 부르며 쿨스칼프 샴푸를 손바닥에 두어 번 눌러 짜서 찹찹찹 두피에 비볐다. 금세 머리카락에 새하얀 거품이 몽실몽실 일어나고 민식은 젊은 시절의 청년처럼 반질반질해져 갔다.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몇 번 헹구고, 달콤한 샤프란 향의 바디워시로 몸까지 씻고 나서야 비로소 그새 희끗희끗 밤새 자란 민식의 수염을 밀 차례다. 우선 따듯한 물로 여러 번 얼굴에 물을 튕기고, 따듯한 수건으로 피부를 꾹꾹 눌러 닦는다. 따듯한 기운으로 모공을 열고 나면 세이밍 크림에 거품을 만든다. 거품을 듬뿍 바른 브러시로 결 따라 몇 번 턱부터 입가까지 마사지를 하자 뻣뻣했던 수염은 부드럽게 유연해졌다. 수염의 방향에 맞춰 힘을 빼고 가볍게 면도날을 움직이면 사각사각 맛있는 소리가 난다. 다시 부드러운 압력으로 면도날을 돌리면 드디어 각진 턱선이 드러나며 민식의 남자다움이 매끈하게 뿜뿜 생겨났다. <침묵>의 임태산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세상에나, 히든이 그 꼬맹이였다니. 민식은 준비하는 내내 어린 히든과의 신박한 인연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눈매와 새하얀 귀가 어쩐지 익숙하단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민식은 마른 수건으로 온몸을 탁탁 털어 닦고, 이마와 턱선에 스킨을 꼼꼼히 바른다. 몸을 덮고 있던 그의 거친 털들이 그새 폴폴 부드럽게 일어났다. 새로 구입한 셔츠의 텍을 잡아 뽑으니 저절로 신이 났다. 새로 산 스트라이프 셔츠깃은 빳빳했다. 여러 번 탁탁 잡아당기며 옷에 길을 들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민식은 자신의 들떠가는 모습에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방금 뜯어 입은 새 셔츠 단추를 툴툴 풀어재꼈다.
맨살의 우람한 가슴이 나왔다. 검붉은 젖꼭지 주변에 서너 가닥 올라온 가슴털이 부드럽게 포슬포슬하다. 그는 원래 입기로 마음먹은 스트라이프 셔츠를 포기하고 새하얀 면티를 찾아 입고, 그 위에 오래돼서 익숙한 데님셔츠로 갈아입었다.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설레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들킨 듯 민식은 아무렇게 걸려있는 낡은 외투를 툭툭 털어 입었다.
민식은 대담한 척, 일상적인 만남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소 들뜬 기분이다. 히든은 신사역 근처 도산공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 차로 움직이면 서로 편할 것 같다며 그녀가 먼저 제의를 해왔다. 늦은 저녁에 보기로 한건 히든의 생각이었다. 히든은 도산 공원 입구에 차를 세우고 민식의 차로 움직이는 게 어떻겠냐고 했었다. 역시 머리가 좋다.
그리고 그들은 신촌의 작은 와인바로 가기로 했다. 민식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와인바는 히든이 오다가다 발견한 곳이다. sns에도 알려지지 않아서 손님이 많지 않은 곳이지만 꽤 분위기가 힙하고, 시크릿 한 곳이라 그들이 잠시 머무르기 좋은 장소라고 했다. 설사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젊은 히든과 대선배와의 만남에 누구 하나 색안경을 끼고 볼 사람은 없었다. 히든은 민식에게 경의를 꾹꾹 담아 밤바람 쐬기에도 딱 좋은 루프탑이 있는 그곳을 적극 추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