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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지마라의 의미

상처가 두려운 이들에게

by 홍그리

상처받는 게 두렵다. 누군가 뒤에서 내 욕을 하는 것이 두렵다.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것이 두렵다. 얼굴에 생긴 작은 여드름 하나도, 새 기분 내며 바꿔본 헤어스타일도, 옷차림도, 안경도, 살이 조금 쪄버린 모습도, 다니고 있는 회사의 상사의 눈치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비칠까 두렵다.

이게 요즘 청년이 가지고 있는 심리상태의 현주소다. 내가 진정 행복해서, 혹은 만족스러워 무언가를 한다기보다 모든 잣대가 본인아닌 타인에게 맞춰져 있다. 그들이 싫어한다면, 특히 한 명이 아니고 다수라면 자기객관화를 떠나 나는 왠지 이 사회 속에 철저히 혼자인 것만 같고, 존재자체의 쓸모없음을 느끼게 될 테니.


그런데 자, 생각해보자. 회사에서, 혹은 친구가 무언가를 잘못 의사결정을 해 화를 불러일으킨 경우를 모두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본인은 원리원칙대로 잘했는데, 타인 때문에 본인까지 피해보면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 근데 그걸 막상 떠올리려고 하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깊게 생각해봐야 겨우 한두개 생각날까말까. 내가 누군가의 잘잘못이 작은 해프닝으로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처럼 타인도 마찬가지다. 당장 내가 오늘 뭘 먹을 것이고, 회사에 출근해서 무엇을 해야 하고,퇴근 후 누굴 만날건지 계획세우기만 바쁘지 그 당시남이 뭘 했는지 헤프닝은 관심조차 없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곪아 터질때까지 상처받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사귀기 전 남녀관계를 통틀어 '썸'이라고 한다. 밀고 당기고 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시기로, 누군가는 이때의 긴장감과 설렘이 연애를 시작할 때보다, 결혼을 할 때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한다. 실제로도 몇배 이상의 강한 자극과 도파민이 나온다. 근데 요즘은 이 썸을 타는 과정에서도 아주 작은 하나의 사건, 상대가 본인을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그 썸 타기를 그만두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난다. 혹은 본인의 적합한 이성기준에 치명적인 흠집을 내거나. 실제로는 그날 하루 당장 기분이 좋지 않았을 수도, 상대가 계속 관계를 발전시켜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먼저 상처받기 싫으니까.

그렇게 내가 상처받는 직전에 관계를 그만두고를 여럿반복하다 결국 혼자를 자처하게 된다.

반대로 상처를 주는 쪽도 마찬가지. 남녀 간의 썸을 얘기했다면 이젠 이별로 가보자.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어도 상대가 상처를 심하게 받을까 두려워 잘 헤어지지도 못한다. 상처 주는 거조차 미안하고 두려워 카카오톡으로 이별통보를 하거나 잠수를 탄다. 관계에서 상처를 조금이라도 줄 수 있는 여지 그 자체의 상황이 지나치게 불편한 거다. 상처를 주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 그냥 어찌 됐든 나 혼자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 속에서 점점 트라우마를 핑계삼아 사람 자체를 피하게 된다.


연애에서만 이런것도 아니다. 길에 사람이 갑자기 사람이 쓰러지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CPR을 하면서 골든타임을 살려 병원으로 보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기껏해야 119에 전화하는그 정도일테다. 왜 그런 용기가 없냐고 들춰보면 두려운거다. 잘못해서 본인한테 해가 될까봐. 어쨌거나 잘해서 칭찬받을 확률보다 조금 틀어져 내 삶에 피해받을 확률이 높으니까. 이 외 사례는 수도없이 많다. 길에핸드폰이 떨어졌을 때 주워서 주인찾아주는 사람 거의없다. 또 귀찮게 찾아줘야하거든. 산부인과는 만삭인 여성이 기존 산부인과가 아닌 다른 산부인과로 급히 출산하려하면 그 위급상황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출산이 잘못되거나 하면 모든 책임은 의사에게 씌워버리거든. 그런 세상이다. 작은 상처하나가 심각한 피해가 되고 그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자체를 안만들려하니 관계간 접촉이 줄어드는 것이다.


'선을 넘는다'라는 말은 어느덧 관계에서의 관용어처럼 자연스럽게 쓰인다. 직장상사와 지원의 상하관계, 친구사이의 관계, 연인에서의 관계, 가족 간의 관계 등우리가 숱하게 겪는 일상 속 관계에서는 무형의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 선은 정해진 규칙도 없고 관례도 없으며 철저히 쌍방 간의 암묵적으로 합의된 기준이다. 그래서 선의 길이는 각자 다 다르다. 친분의 정도에 따라, 관계가 오래된 정도에 따라, 이 선은 길기도하고 짧기도 하다. 이 선은 곧 현대인에게 또 하나의 신경 써야 하는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서로의 선을 넘지 않으려 필요한 말을 할 때에도, 분위기를 돋구고자하는 장난을 칠 때에도 어떻게든 그 사이를 아슬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정도를 지켜야 한다.

즉, 이 선은 뭐냐. 선도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만들어둔 최후의 방어선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 간의 관계는 선이 요점이 되어 서로 조심스러워지면서 건조해지고 삭막해진다.


그럼 여기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누굴까. 타인에게 적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알면서도, 그게 아니라면 본인이 상처받을 수 있는 걸 알면서도 먼저 용기 있게 선을 선의로 넘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관심 있게 먼저 손 내밀고 다가가는 건 현대사회에서 일생일대의 큰 결심이다. 왜? 관심을 받는 것보다 주는것이 훨씬 더 어렵거든. 어쨌거나 내가 용기를 낸 거잖아.

이건 사랑이 됐든, 우정이 됐든, 쓴소리를 하는 선배가 됐든, 선생님이 됐든, 부모든 다 똑같다. 가만히 있으면본인도 상처 안 받고 편하게 사는데 본인 기분까지 언짢아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릎 쓰고 내게 오는 관심이니까. 그래서 요즘 어떤 경로든 먼저 평균이상의 관심이 내게 느껴지면 평소보다 더 특별하고 값지다 여기게 된다.

한편으로는 모든 상처의 원흉이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할때 이런 상처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의신중함은 필연적인 걸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뇌는 고작 2500테라바이트의 기억용량을 가지고 있다. 생각보다 참 작다. 그 작은 뇌에서 내게 온 관심과 사랑이다. 상처가 생길까 두려운 그 마음 공백에 따뜻한 마음으로 화답해야겠다. 최대한 그들에게 이 험한 세상에서 그나마 좋은 것만 엄선해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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