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에 대하여
독서실과 방안에만 틀여 박혀 소방공무원을 4년간 준비하던 친구가 있다. 지인의 연락을 모두 단절한 채, 하루에 커피를 시키거나 밥을 시킬 때만 한두 마디하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공부에만 전념하던 그는 올해 시험에 낙방한뒤 시험준비를 그만두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면서 친구도 만나고, 연애도 하려고 소개팅을 열심히 다니고 있다. 주변의 모두가 그의 소방공무원합격소식을 기다렸기에, 이번에 낙방했을 때 걱정 가득한 상태에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근데 웬걸.
그는 훨씬 더 밝고 삶에 의욕이 가득했으며, 새로운 목표도 생겨 그때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젠 재테크와 결혼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고 오히려 더 좋아한다.
막연했던 공무원준비시절엔 열심히 해도 시험 당일의 컨디션과 운, 경쟁률 등 모든 것이 받쳐줘야만 합격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지금 생긴 목표는 노력하면 그대로 드러난다고 오히려 만족해한다. 그의 밝은 태도는 주변사람 모두를 안심시키고, 와닿는 에너지를 느끼게 했다.
이를 보면서 나는 언제 저랬던 적이 있었지 하며 문득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스친다.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움켜잡으려 안간힘을 써도 잡히지 않는 무언가에 괴로웠던 나날들. 특히 20대, 30대 초는 대부분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춰있지 않은 상태 가령 취업, 연애, 경제적 상황 등 주변인과의 비교와 더해지며 온갖 불행한 상황들에 봉착한다. 그리고 그 당시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해결책은 내가 현재 가진 목표만 이루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는 망상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시험에 합격하면 연애도, 결혼도, 재테크도 모든 게 문제없이 탄탄대로로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 이 대기업에 취업만 한다면 남부럽지 않게 SNS에 자랑도 하고,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친구들에게 안 꿀리고 당당하게 살 거라는 기대. 지금 이것만 잘 되면 저절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니, 여기에만 내 인생을 바쳐 올인을 해보자는 생각.
사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이루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대사회에서는 상위 5%다. 이루면 좋다. 이루면 실제로 본인이 원했던 그림이 펼쳐질 수도 있고, 설령 안 펼쳐진다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걸 노력해서 이뤘다는 성취감은 그 어떤 선물로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자양분이 된다. 근데 그건 본인이 다시 노선을 틀어 전혀 다른 새로운 걸 도전한다 하더라도 이룰 수 있는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것이, 앞서 말한 그성취감이 절대 패배할 수 없는 기세를 만든다. 그리고 그 성취가 또 다른 성공을 낳는 그런 선순환이 펼쳐진다. 그러니, 이 세상에 자칭 성공한 사람들이 얘기하는 미쳐야 성공한다는 논리도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는충분히 유효하다. 젊음과 열정이 있을 때 해볼만큼 해보는 것도 후회 없는 선택 중 한 가지. 근데 거기서 그 열정이 다 소모될 만큼 해봤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이뤘는데 생각보다 성취가 없다면? 꿈은꿈으로 두었을 때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난 여기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그 이후의 얘기를 해 보고자 한다. 포기해도 다른 선택지는 분명 있고, 더나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신문 1면에는 오늘도 이 세상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 1면을 장식한다. 대통령 둘이 정상회담을 나누고, 누군가는 스포츠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골을 넣고, 유명연예인의 가십거리로 서민들의 지루함을 달래고 있다. 이들에 상향평준화된 우리는 늘 그렇게 성공에만 길 들여져 성공 뒤편에 가려진 99%의 사람들을 비웃는다. 아니, 알면서도 못 본척한다. 본인에게 전혀 득이 될 것이없기 때문에. 그래서 성공하고자 오늘 하루를 갓생 살면서 알차게 보내는 그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못 이룬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난 종종 묻는다. 괜찮냐고. 그들은 분명 대부분의 사람의 예상과 다르게 이렇게 답한다. 응 너무 괜찮다고. 오히려 좋다고.
이미 가능성이 희박한데 무언가를 끝까지 놓지 못하는건 사실상 집념보다는 집착과 객기에 가깝다. 20대와 30대에서는 1년, 1년이 그 어떤 돈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아주 소중한 기간인데 그걸 열정과 가능성 하나 믿고 놓지 못한다면 잃게 되는 매몰비용이 훨씬 더 크다는 것. 그래서 안되면 충분히 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인생에 여백을 놓고 공간을 좀 더 만들어보자는 마인드다. 어떻게 하느냐. 말 그대로 무언가 하나 실패했다고 좌절하지 말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행도 가고, 혼자만의 쉼도 느껴보고, 하늘도 보고,자연도 느껴보고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퇴사하고 돈이 모자랄 텐데 여행에 가서 돈을 쓰는 이유가 뭘까?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리프레쉬를 위해서다. 다 그런 거다.
공무원시험에 불합격해도, 대기업에 합격 못해도,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1등을 못하고, 서바이벌에서 지고, 경기에서 패배하고, 승진누락되고 해도 안 죽는다. 그렇게 된 김에 인생에 다른 즐거움도 느끼면서 살아보면 또 다른 양질의 무언가로 삶이 채워지지 않을까. 밀물과 썰물처럼, 다 빠져나간 자리엔 늘 또 다른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채워진다. 그중엔 좋은 것들도 있다. 그게 오늘 주식이 폭등해 몇백만 원을 버는 거라던가, 월급이 오른다거나, 집값이 오르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지다고 본다.
돈에 미쳐있거나, 명예에 미쳐있거나, 어떤 것의 결핍으로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무언가에 미쳐있는 사람들은 그 미쳐있는 순간이 양질의 시간이라고만 맹신하는 맹점이 있다. 그게 꼭 돈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꿈이 됐든, 목표가 됐든, 공부가 됐든, 인생에 선순환을 이끌 수 있는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한 개인의 영역에서 본다면 그건 명백히 '시간'을 몰입하는 일이다. 그 시간에 연애도 못하고, 여행 한번 못 가고, 가족,친구 간 추억하나 못 만들고, 술 한잔 맘 터놓고 못 마시고, 청춘 자체를 다 써버리는 꼴이다 ‘단순히 노력했으니 됐다’가 아니라, 다시는 본인에게 오지 않을 기회비용 자체를 날려버린 꼴이다.
최근 지인은 공공기관에서 순환근무제를 하고 있는데 전혀 생전보지도 못한 외지로 발령이 났다. 그때 위로나 격려 차원에서 건넸던 말 한마디에 대한 답변이 꽤나 인상 깊었다.
"00 간 김에 바다도 보고 서핑도 하고~, 조용한 곳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정신수련이나 좀 하다 오지 뭐. 여유롭고 얼마나 좋아"
그렇게 본인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건, 이 경쟁만 그득한 자본주의에서 나만의 편안한 시간을 돈을 지불하지않고도 산 격이다. 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쉬었다 결승점에 도착해도 크게 상관없다 이 말이야. 돈 많은 파이어족도 내 사랑하는 사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진심 어린 취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충만한 감성 없이는 허무밖에 남지 않는다.
잠시 나만의 공간을 두면서 인생에 더 필요한 걸 우린 습득 중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그리고 그 공간이 어느 정도 찼을 때 다시 달리면 된다. 악착같이 매일 뭔가에만 미쳐서 스트레스받으면 본인만 단명한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깔끔히 포기할 찰나 새로시작하는 게 두려운 지인과의 대화에서 든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