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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최대한 피해라

싸한 순간에 대하여

by 홍그리

싸했던 순간이 있다. 말과 글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이 느낌에 명징한 어떤 근거 따위는 없다. 이 감정은오랜 기간 익숙한 환경에 있을 때보다 새로운 사람 혹은 장소에 단기간 노출됐을 때 대개 발현된다.

오랫동안 익숙한 환경과 사람 사이에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경우라고 하면 대개 상대가 평소에 불합리하다고생각하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열위에 있거나 트라우마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때 인간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거든.

우린 모두 사실상 가면을 쓰고 있다. 회사에서 친절한 과장님, 집에서는 가정적인 남편, 가정적인 아빠, 나아가 좋은 형, 동생으로 사회에서 비치도록 매일 노력한다. 근데 그 과정에서 나한테 금전적으로, 혹은 내 자존심을 치명적으로 건드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본성을 드러낸다. 무너져버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혹은 내 돈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누군가 큰 호의로 본인의 돈을 상대를 위해 쓴다거나, 자존심을 잃어가면서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건 실제로 마음을 다 주는 일이기에 큰 용기다. 상처받을 걸 알면서, 본인에게 손해 받을 걸 알면서 본인의 시간과 돈과 관심을 쓰는 거니까.


반대로 새로운 사람과 장소에 장기간 노출됐을 때를 생각해 보자. 서로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스몰톡이나, 가벼운 정보습득의 시간을 갖는다. 한마디로 간을 본다. 이들에게 직접 겪은 싸했던 순간은 나와의 관계에만 치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나를 대하는 사람이었다. 대개 이런 사람들과는 끝이 좋지 않았다. 가령, 누군가 내게 생일선물을 보냈다 치자.

진심으로 내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한 선의가 아니라 본인도 본인 생일에 선물을 받을 걸 당연히 기대하고 있는 그런 목적.

내 결혼식에 왔다고 하자. 내 결혼을 진심 어리게 축하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도 나중에 결혼을 할 때에 하객을 늘리기 위해 내 결혼식을 온 것이다.

요즘 뜬다는 러닝모임이라던가, 독서모임이라던가, 영어회화라던가, 등산동호회라던가에 가입해서 모임에 맞는 어떤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음침한 목적이 있는 사람들. 여자를 꼬셔보겠다, 책을 쓰기 위한 정보만 얻어가겠다, 러닝을 더 효율적으로 잘할 수 있는 방법만 얻어가겠다, 이런 식이다. 실제로 취업준비 시절 면접스터디에서 본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신상오픈을 최소화했으며 남들이 말하는 걸 다 메모해서 비법만 얻어가는 사람도 봤다. 그 사람은 끝내 면접에서도 탈락하고, 주변에서도 싫어하고 여러모로끝이 좋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느낌이 처음부터 싸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느낌은 본인에게 분명히 오게 되어있다.눈빛만 보면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딱 들어맞는 관상이 있는데, 이 관상이라는 건 100% 논리적으로 들어맞는 것도 아니고, 사견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말하진 않겠다. 그 모든걸 차치하고서도 이런 사람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가까이하려고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더 친해지고 마음을 줘서 이사람을 바꾸려고 할 필요도 없다. 왜? 어차피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바뀌지 않는다.


목적이 있다는 건 사실 꽤나 건설적이다. 안 좋은 게 아니다. 본인만의 철저한 계획과 목적대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실제로 목적이라는건 현재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이상적인 걸 바라는 미래지향적인 단어거든. 현재 본인이 생각하는그걸 가지고 있다면 굳이 목적을 둘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어떤 면에서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는 것. 문제는 뭐냐. 그 목적이 상대에게 해를 입히거나본인은 절대 단 1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소시오패스적 마인드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 그게 문제다. 여기까지도 뭐 크게 상관없다. 근데 그것이 타인에게 티가 날 때 큰 이슈가 생긴다. 양쪽 모두가 괴로워진다.

일상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소개팅을 가서도 금전적으로 얼마를 모았는지 물어본다거나, 직업이 어떻게 되냐는 둥, 연봉은 얼마냐는 둥, 부모님은 뭐 하시는지 물어보는 것 자체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을 알아가려 하지 않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 사람을 재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

처음 그 싸했던 순간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절대적으로 믿고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보험이라던가, 중고차 딜러라던가, 카드상담사라던가,어떻게든 알고 본인에게 전화가 온다. 그 전화의 목적은 그 영업으로 본인의 실적을 채우기 위함이다. 그게 진짜 목적이다. 근데 소비자를 속이는 방식은 나날이 발전한다. 처음 본인의 보험 상태를 무료로 진단해 주겠다며 한번 미팅을 하자고 한다. 무료로 이까지 온다고 한다. 그래놓고 상담을 해주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 부족한 것에 대해 지금 하지 않으면 심각한 듯이 말하면서 영업을 한다. 그래서 싸했던 순간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사람만 이럴까. 회사를 가도, 사업을 하는 사회생활도 마찬가지. 필요할 땐 간과 쓸개도 다 줄 것처럼 그렇게 친한 척을 하는데 본인이 잘 되거나 필요 없어지면 과감히 버린다. 누군가 본인에게 잘해주면서 위로도 해주고, 혼도 내고, 팩폭도 해주고 하는 착한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본인에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피해가 가니까 그럴 확률이 높다. 진로를 설정할 때도 마찬가지. 꼭관련 산업에서 인턴이나 최소한 알바라도 해보아야 한다. 본인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그 일이 실제와는 전혀 상반된 부분이 많거든. 근데 겉으로는 아름답고 멋지게 포장돼 그 직업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보일 확률이 높다. 그래야만 공급은 그대론데 수요가 늘어나면서 그 직업의 수입이 늘어나고 봉급이 늘어날 테니까. 처음 몇 달 아니, 며칠이라도 경험해 보고 싸한 순간이 들면 그 감정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냥 바로 나오는 게 시간낭비를 막는 길이다. 진득함이 없냐느니 꾸준하지 못하다느니 하는 꼰대는 그냥 무시하면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 싸하지 않았던 순간은 뭐였냐. 처음부터 좋았던 감정이 그냥 쭉 한결같았을 때. 그리고 그 한결같은 주체가 나일 때. 거기서 모든 게 확장되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이 직업이 경험했는데도 계속 좋았고, 이 사람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데도 나에 대한 태도가 한결같이 변함없다고 내가 판단하고, 상대가 그 어떤 조건이나 목적이 바뀌어도 본성은 그대로인사람.다른 목적 없이 아무것도 내게 바라지 않는 장소 그리고 사람. 생각해보자. 남들이 좋다는 걸 백날 해봤자 내가 싫어하면 그건 시간낭비다. 내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관심 있는 걸 하고 좋아해야 하는 걸 해야 본인이 즐겁듯, 내 판단에 의거한 한결같은 것들이 내 행복과 세상 전체를 밝게 한다고 본다. 그래서 난 같은 여행지를 두 번 이상 갈 때가 많다. 세상엔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않는 것들이 있거든.


싸한 순간이 왔을 때 조금만 더 참으면 빛을 볼 수 있지않을까?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지금만 참으면 낙이있지 않을까? 하는 사람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더 악화될 확률이 좋아질 확률보다 최소 2배 이상은 높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그렇게 시간낭비를 할 필요가 있나. 자본주의에서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거거든. 시간이 많으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건강도 챙길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아끼는 이들이 느낌이 싸하다는 고민을 말할 때 말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아니, 그래도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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