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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말고 기술 배우기

10화: 실속

by 홍그리

어느덧 1개월이 흘렀다. 공인중개사 형은 회사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회사 앞에 마라탕집을 차렸다. 약속대로 공인중개사는 언제든지 원하면 늙어서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단다.

물론 처음에는 돈이 없으니, 친구와 동업해서 직영점으로 해서 ‘라쿵푸 마라탕’을 차렸다. 프랜차이즈라 하지만 지방상권이라 주변에 마라탕집도 없어서 장사가 잘 된다. 우리가 점심에 단체로 몇 번 가 팔아주기도 했다. 다음 주에 저녁 회식이 있는데 그때도 한번 가주기로 한다. 주말 없이 매일 일하지만 형은 즐겁단다. 그걸로 됐다.


민정 씨는 마침내 서울에 한 중견기업에 붙었다. 매출액기준으로는 1조가 넘어 거의 대기업과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연봉은 초봉이 5천정도고, 업계 2위라 아주만족한다고 한다. 신입교육을 받느라 카톡을 보내도 답장도 읽씹 당하거나 늦게 보낸다. 남자에 그렇게 관심도 없다더니 맨날 내가 영화보러가자하면 거절하고,데이트신청도 마다하더니 인스타그램을 보니 벌써 서울에 남자친구도 생긴 것 같다. 장미꽃사진을 프사로 해놓은 걸 봐서 분명 뭔가가 있다. 역시 연애를 하기 싫은 것이 아니었고 그냥 내가 싫었던 거였다. 남자친구는 분명 벌써 자리도 잡고, 차도 있고, 결혼할 준비가 완벽히 되어있는 그런 남자라고 한번 추측해 본다.


이제 이 지사에서는 나만 남았다. 매일 공짜 도서관으로 180만 원 정도 받는다 하지만, 사실 매일 앉아서 남들은 바쁘게 일하는데 공부하는 것도 눈치 보이고 이 경력을 나중에 면접 볼 때 의미 있게 봐줄지도 의문이다. 특히 면접에서는 아무리 내가 독서실처럼 공부 안 하고 관련 일을 했다고 꾸며댄다 해도 언젠가는 들통나기 마련이다. 특히 공기업면접이라도 봤다가는 무조건 들통나는 것이, 그 공기업조차 청년인턴을 이렇게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거든. 솔직히 말하면 내년에 31살인데 시간낭비하고 있는 꼴 밖에 안된다. 정부에서도 사실 전국적으로 이렇게 많은 인턴을 채용하는 목적자체도 취업률을 올리기 위한 보여주기 정책이란 걸 누가 모르겠나. 나도 다음 주부터는 과감히 그만두고 맨땅에 헤딩을 해보려고 한다. 그럼 오늘이나 내일 그만둔다고 미리 말씀을 드려야겠지. 점심시간을 한번 노려봐야겠다.

점심을 먹고 담당 주임님께 넌지시 용기 내어 말한다.


“주임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헐, 뭐야, 갑자기 불안하게. 너도 그만두려고?^^;”


“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 그냥 최대한 빨리 그만두기 위해 둘러댄다.


“오? 어디 붙었어? 회사 붙은 거야?”


“아니요, 그냥 취업 전에 여러 가지 경험해 보면서 한번 부딪혀보려고요”


나는 알고 있다. 회사에서 퇴사를 할 때에 이유를 잘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어디 붙었다고 하면 벌떼같이 달려들거든 어디 붙었는지, 연봉은 올려서 가는지 어떻게든 알아내려 한다. 그리고 만약 말을 하지 않아도 지인을 통해 어떻게든 뒷조사를 해서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의 목적은 진정으로 내가 잘되길 바래서가 아니라, 본인이 받는 현재 월급보다 많이 받는지, 거기가 진짜 들어가기 힘든 곳인지, 좋은 곳인지 그리고 여기 남아있는 본인은 현재 괜찮은 건지 스스로 자기 검열도 적당히 해가면서 비교하기 위함이다. 만약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곳보다 조금 안 좋은 곳으로 갔다면 ‘에이, 그럼 그렇지’, 하고 안심할 것이고, 더 좋은 곳으로 갔다면 질투와 시기가 흘러넘쳐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 여기서는 사실 (아무 일도 안 하는) 청년인턴이라 크게 신경안 쓸 테지만.


역시 소문은 소문답게 불과 40분도 안되어 전 지사에 다 퍼졌다. 그리고 본부장님 귀에 들어가 간단히 면담을 한다.


“그래도 형규씨, 월급날도 있고 해서 다음 주까지는 나와줬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흠. 일단 다음 주 말일까지는 꼭 채워달라고 한다. 본부장님 말씀이니 당연히 들어야지 당연히. 암 그렇고말고.


이제 진짜 맨땅에 헤딩이다. 지방대 출신에, 겨우 토익도 지원자격을 넘긴 내가 애초에 대기업에 가고자 이렇게 발버둥 친 것 자체가 어쩌면 넌센스다.

나 같은 놈은 사회가 얼마나 냉정한지, 그리고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직접 부딪혀봐야 세상을 안다. 그리고 그 돈도 소중히 여겨서 재테크를 한다.

매일 엄마가 쥐어주는 돈, 공짜 독서실에서 안락하게 돈을 번다면 매일 쉬운 일만 찾아다니고, 요령을 피우며 어느 곳에서든 성장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취업지원은 지원대로 하고, 어떻게든 돈을 내 힘으로 벌려고 한다. 일단 하루에 자기소개서 하나 쓰기, 그리고 투잡을 통해서 생활비를 직접 벌어보는 게 가장 중요한 단기목표다. 그래야 내가 당당하고, 내 힘으로 번 돈이니 더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다고 본다.


잡코리아를 연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쿠팡배달, 물류센터 알바밖에 없다. 아니면 노가다라도 해야 한다. 일단 다음 주까지는 인턴을 나와야 하므로 쿠팡배달이나, 물류센터는 할 수가 없다. 이분들은 당장 내일부터 와도 된단다. 그만큼 사람이 매일 필요하고 일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정 아무 일도 할 게 없을 때 들여다봐도 된다. 이럴 때는 사지멀쩡한 것이 나름 다행으로 여겨진다. 아, 갑자기 얼마 전 엄마가 친구한테 추천받은 일일 일자리를 추천해 줬던 기억이 났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본다.


“엄마, 엄마 저번에 엄마 친구 아저씨 노가다 뭐 일자리 필요하다 하지 않았어?”


“응 왜? 너 하게?“


“응 나 해보게, 그리고 천천히 준비도 하고 하면 되지. 일단 돈은 벌어야 하니까”


“아이고, 대견해라. 그래 잘 생각했다. 나도 지금 연락 한 번 해볼게. 장하네 우리 아들. 난 네가 안 할 줄 알았거든”


엥? 엄마가 의외로 칭찬을 해준다. 뭐지? 내 생각에 그래도 꼴에 대학 나왔다고 노가다같은 건 자존심이 있어 안 할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으니 엄마가 대견하게 보는 것 같다. 그래, 그렇게치면 이 자체만으로 집에 있는 히키코모리나 은둔청년보다는 백배 천배 낫지 않은가.


어느 회사에 이직을 해도, 내가 어딜 붙어도, 수군대는 회사 사람들처럼, 회사에 취업한 민정 씨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스스로의 자격지심에 그의 남자 친구를 추궁하고, 남자 친구에 열등감을 느끼고, 내가 이 위치에 있어서 민정 씨가 받아주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마음처럼, 이제는 모두 다 내려놓기로 했다. 어차피 이런 비교와 열등감은 내 인생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이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 갉아먹는 짓이다.

내가 번 돈은 어차피 내가 쓸 거고, 남들이 얼마 벌든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그게 나한테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나만 당당하면 된다. 그걸 나이를 30살 먹고야 알았다. 내 돈으로 남한테 피해 안 주고, 밥 먹고, 엄마한테 생활비 주면서 그렇게 당당하게 살면 된다. 이게 맞는 거다.


노가다는 한 달에 20일 정도로 일을 하기로 한다. 회사직장인처럼 최소 이 정도는 일해야 스스로 나태해지지 않거든. 이전에도 몇 번 노가다는 해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다. 하는 만큼 벌어가는 것처럼 이 세상에 공평한 게 뭐가 있나. 노가다를 하는 데에는 용어가 있다. 바로 공수다. 하루 8시간 일한 양을 ’1공수‘라고 한다. 이틀 치 일을 했다면 ‘2공수’다. 이렇게 공수 별로 급여를 받는다. 예를 들어,


“아, 오늘 일이 너무 많아서 1 공수 반했다”

하면 하루치의 1.5배의 양을 쳐준다는 거다. 급여도 당연히 1.5배겠지. 또,


“그 현장은 2공수 잡혀”


라고 하면 해당 현장은 작업량이 많아서 이틀 치 인건비를 다 준다는 개념이다. 오랜만에 해보는 거라 꽤나 기대가 된다. 면접 전날보다 더 큰 도파민이 생성되는 기분이다. 꼭 컴퓨터 앞에 앉아서 타자만 치는 게 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은 아닐 테다. 생산직이 공부 못해서 한다는 말은 다 옛날얘기다. 마음 편하고, 하는 만큼 벌고, 오히려 내 한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나날들 그리고 어떤 기회가 올진 아무도 모르는 일인 거다. 우연히 잘 맞아서 기술을 배울 수도 있지 않나.


대기업 사무직만이 답은 아니었다. 긴 취업준비생활, 그리고 청년인턴 간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돈과 바꿀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얻은 셈이다. 비교가 의미 없고, 내가 편하고 좋은 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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