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가장 어려운 숙제
10월 2일 09:00 00 공사 본사 앞. 대망의 첫 출근 날.
민정씨와 중개사 형과 나는 본사 앞에 도착한다. 오전엔 간단히 입사 관련 교육을 받는단다. 6개월 정도의 계약직에 불과하니, 오전에만 간단히 교육을 이수하면 되는가 보다. 인턴이 하는 일은 각 지역 부동산 지사의 서류를 정리하고, 계약담당자와의 민원을 처리하고, 청약 대상자의 계약을 돕고, 때로는 지역 관련 봉사를 가기도 한다. 이를 교육해 주는 정규직 직원분은 6개월마다 하는 정례행사처럼 영혼 없이 교육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교육이 한 시간가량 끝나고, 지사장님과의 면담이 있다. 지사장님은 잘 왔다면서 앞으로 회사생활이 긴데, 시작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선배에게 많이 물어보고 배워가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인사말을 한다. 틀에 박힌 인사라 할지라도, 아무리 인턴이라지만 이렇게 좋은 말씀이라도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다행히 우리 셋은 찢어지지 않고 집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되는 서부산지사에 발령받았다. 3개의 팀에 각 인턴 한 명씩 배치된 셈이다. 우리 팀은 4명이다. 팀장, 그리고 주임님 둘, 나. 팀장님은 늘 회의에 가시고 자리에 있는 시간이 잘 없다. 주임님 둘은 매번 전화벨소리에 짜증 섞인 말투로 전화벨 넘어 고객과 싸우고 있다. 내가 앉으니, 한 주임님이 말하신다.
“형규씨, 내일부터는 공부할 것 챙겨 와^^“
“네?”
“하루종일 앉아서 뭐 할 거야. 공부할 거 하거나, 자기소개서 작성해도 돼요”
라고 말씀하신다. 흠. 당황스럽다. 교육시간에 배운 내용이랑은 전혀 딴판이다. 이렇게 대놓고 공부하라고 하는 곳도 있구나. 그렇게 책상정리 좀 하다, 사람들 눈치 좀 보다 칼퇴를 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이젠 어느 정도 출근 후 루틴이 생긴 듯하다. 오전에는 내내 인적성문제를 푼다.
옆팀에 민정씨와 중개사 형도 보니 혼자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다. 아마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듯하다. 이런 날들이 6개월 동안 계속된다고? 공공기관 인턴은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돈 주는 독서실이 따로 없네. 어떤 날은 내 이름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적도 있다. 내가 출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 뭔가 나도 이 회사에 필요해서 뽑혔을 텐데, 그런 마음조차 사라지니 출근길에 일이 없어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든 내 힘으로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게 있어야 지속가능성이 생기는 법이다. 가끔씩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는 것 말고는 그냥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물론 조직에서 소외된다는 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알고 있지만 이렇게 공부하면서 최저시급이라도 벌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하다고, 내가 취업 준비 중에 인턴을 지원한 건 돈걱정 없이 취업준비를 할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다고 자위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국민혈세를 낭비한다는 생각. 정부는 6개월 청년인턴도 취업으로 간주해 취업률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은 이 청년인턴이 청년들에게 취업역량을 강화하고, 청년실업률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껏 포장한다. 이런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월 190만 원이라도 받기 때문에 조금 더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취업준비를 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이 든다. 종종 연락하는 예전회사 동기들, 고등학교 친구들, 결혼한 친구들은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어떻게 보면 본인만의 노하우나 경쟁력을 쌓아가는데, 하다못해 출산을 한 친구도 육아경험이나 노하우라도 쌓아서 아기를 잘만 키우는데 나는 이 6개월이라는 시간을 월 190만 원 주고 사고 있는 게 아닐까. 내 값어치는 한 달에 190만 원인 걸까.
오늘은 그래도 퇴근 후, 중개사 형, 민정 씨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맥주 한잔을 시키고 짠을 하고 내 고민을 얘기한다.
“우리 지금 이렇게 공짜로 돈 받고 출근하는 게 맞는 걸까? 누구는 부럽다고 난린데, 아까운 시간을 돈 받고 그냥 흘려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차피 오빠 아직 붙은데도 아무 데도 없는데, 정규직 붙을 때까지 여기서 취업준비 한다고 생각하면 개이득 아니에요?”
민정씨가 말한다.
“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난 형규 말이 맞다고 생각해 적어도 내 입장에선. 난 공인중개사자격증도 있고, 부동산 직무에 실제로 관심이 생겨서 온 케이슨데 배우는 것도 없이 그냥 시간낭비만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 같아. 노가다도 사실 처음 청소부터 시작해서 일이 년이면 노하우도 익히고 직접 철거도 하고 하는데, 190만 원에 그냥 놀고먹으면 결국 남는 게 있을까? 그냥 공인중개사무소 하나 차리고 6개월이라도 먼저 시장에 뛰어드는 게 나한텐 베스트인 거 같아”
중개사 형이 말한다. 중개사 형말도 맞다. 나이도 있고, 시간이 금이니 굳이 여기서 최저시급 받으면서 돈 주는 독서실을 굳이 다닐 이유는 없다. 민정이는 그래도 나이가 어리니 취업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돈도 받고 좋은 경험일 수도 있겠고. 그럼 난 뭐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지금 이 청년인턴을 운 좋게 붙어서 하고는 있는데 이걸 6개월 함으로써 얻는 효용성이 뭘까.
두 개가 있다. 먼저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을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 이걸로 인터넷강의를 들을 수도 있고, 면접 준비를 할 수도 있고, 교재를 살 수도 있고 정장을 살 수 있고 취업캠프를 들을 수도 있다. 둘째, 바로 공백기.
한국취업시장에서 공백기는 실로 당락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1년까지는 공백기를 면접에서 잘 설명하면 어떻게든 넘어가긴 하는데 문제는 이 공백기가 1년 반에서 2년을 넘어가면 면접기회 자체가 잘 주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면접현장이 취조현장으로 바뀐다. 왜 2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었냐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모든 질문에 방어해야 한다. 공백기 동안 정확하게 뭘 했고, 뭘 이뤘으며, 거기서 느낀 점은 무엇이며, 이건 본인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공백기라는 당위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게 납득될 때까지 면접은 끝나지 않는다. 면접관이 이 과정에서 포기하면 그 면접은 탈락하는 거고, 면접자가 대답을 못하고 포기해도그 면접은 탈락하는 거거든. 그래. 남기로 한다. 나는 이 돈을 받으면서 세상에 없는 돈 주는 독서실을 다니고 있는 럭키가이야! 정부에서 돈을 주든, 기업에서 돈을 주든, 뭘 하든 일단 내가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건 최소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 그러다 문득 유레카를 외치듯, 좋은 생각이 난다. 그래 어차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거면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곳에 들어가자.
아니, 솔직히 15년이 넘도록 사회가 정한 대로 제도에 짜인 것에 집착해 왔다. 물론 못 이룬 것도 있지만 어떻게든 그 근처에 가려고 발버둥 쳐왔지 않나. 명문대를 가야 하고, 어떤 학과를 가야 하고, 토익은 900이 넘어야 하고, 영어 말하기 시험에, 대기업 인턴에, 어학연수에, 하나를 끝내면 또 하나가 있고, 또 하나를 끝내면 또 다음 스텝이 있고. 이러다 대기업 가고, 결혼해서, 출산하고, 퇴직하고(혹은 그전에 잘리고) 노후준비하다 뒤지면 얼마나 억울한가. 또 이 제도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려 하니 그건 또 겁이 난다. 아무런 안정장치 없이 사회에 뛰어들어 자영업을 한다거나, 노가다를 한다거나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건 진짜 개고생이라는 걸알거든. 내 친구는 자영업인데 장사가 안 돼도 매일 쉬는 날 없이 7일을 일한다. 전기세, 수도세 나가는 게 아까우니까. 그나마 그 사이에서 제도를 벗어나지는 않되, 내가 조금이나마 잘할 수 있는 거, 좋아하는 직무를 해보는 거야. 다 같이 있는데서 말해본다.
“뭘 하든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본인이 좋아하는 거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게 맞지. 나도 사실 내세울만한 스펙이 없어서 엄마가 권유해서 이거 딴 거야. 사실 공인중개사는 아줌마들도 일 년 바짝 하면 따잖아. 사실 내가 뭐 이쪽에 원래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뭘 해서든 망하면 또다시 그때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나가서 그냥 장사나 해볼까 싶기도 하고. 사실 친구랑 좀 생각해 둔 게 있거든”
“오 뭔데요?”
“마라탕. 친구가 여기서 가맹점을 내는데 같이 한번 해보자고 하더라고“
“대박! 형 요리 좋아하시잖아요”
“대박이네요. 저는 뭐 일단 마케팅이라는 직무가 좋아서, 서울에 화장품마케팅이나 식품업계마케팅이나 닥치는 대로 써보려고요. 그게 좋아하고 관심 가는 직무기도 하고”
민정 씨가 말한다. 이렇게 이 청년인턴 셋은 청년답게 미래의 고민들로 술잔을 채운다. 그리고 맥주잔을 연달아 부딪히며 집에 오니 벌써 열한 시. 내일도 미리 돈 주는 독서실에 가기 위해 공부할걸 챙겨놓는다. 내일은 나도 관심분야 자기소개서를 써봐야지.
어디 꼭 취업뿐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내가 좋아하는 걸 찾고 그걸 계속하면서 그걸로 먹고사는 문제다. 근데 이게 또 딜레마인 것이 그걸로 먹고살면 돈에 매몰돼 본래 좋아했던 것이 싫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 어렵구나.
세상은 이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10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