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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비정규직 합격

8화: 썩은 동아줄

by 홍그리

민정 씨는 이쁘다. 누가 봐도 이쁘다. 이쁜 데다 성격도쾌활해 주변에 지인도 많다. 여기저기서 전화도 계속 온다. 나는 핸드폰을 시계용도 그 이상으로 여기지도 않는 와중에. 그나마 내가 스터디 조장이니까 어떻게든 말이라도 섞어볼 수 있는 거다. 만약 내가 거리에서 그녀에게 번호를 물어봤다거나, 대학교 선후배사이로 만나 찝쩍댔다가는 아마 읽씹 당했거나, 최소한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 네, 사투리 고쳐볼게요"


면접연습에서 이렇게 지적당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맞다. 나는 첫눈에 반한 것이다. 반대로 상황을 바꿔 내가 면접관 역할을 하고, 민지 씨에게 질문을 한다. 자기소개서를 본다. 청년인턴인데도 자기소개를 꽤나 성의있게 잘 썼다. 대외활동이나 조별활동이 주로 다지만, 딱 답변에 충실한 답변을 하니 그 어떤 걸로 트집을 잡을 일도 없다. 보통은 이런 스터디를 하면, 스터디가 끝나면 저녁에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 서로 취준 한탄이나 무용담도 하면서 친해진다는데 요즘은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벌써 세 번째 스터디다. 내가 아무리 끝나고 뭐 하시냐라고 같이 저녁이나 한번 먹자는 분위기를 만들어도 좀처럼 시큰둥한 반응이다. 아무래도 곧 면접날이고, 곧 이 스터디는 없어질 예정이니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한번 더 분위기 조성을 해본다. 그래야 민정 씨랑 말 한 번이라도 섞어볼 것이 아닌가.


"저, 이제 면접도 얼마 안 남았고, 스터디도 끝나가는데 저녁 한번 먹을까요?"


"아, 저는 스케줄이 있어서 다음에.."


"네, 저도 요즘 너무 바빠서 저녁에 시간내기가 힘드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고 가버린다. 아무래도 요즘 취업준비가 워낙 팍팍하고,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롭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사귀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기 때문일 거다. 이 스터디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피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그럼 마지막에 나오지도 않았겠지. 그만큼 그냥 '무관심'인 거다.


그 외에 한번 정도 더 스터디를 하고 드디어 면접날 9월 27일이 밝았다. 오전 10시가 면접이니 9시 50분까지만 면접실에 들어가면 된다. 9시에 샤워를 하고, 9시 30분에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다. 물론 바지는 반바지 차림이다. 워낙 취준 하면서 AI면접을 많이 봤기 때문에 이 정도는 껌이다. 그만큼 단련이 되어있다. 절대 면접관은 일어나봐라라며 옷을 잘 갖추어 입었는지를 심사하지 않는다. 면접을 하면서 아, 얘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사람이구나. 우리 회사 분위기랑 맞겠다 혹은 모범답안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구나. 그걸로 끝이다.

그래도 아무리 청년인턴이라지만 면접 보는데 긴장이 좀 된다. 10시가 되자 누가 봐도 직장인 같은 중년 여성 분이 등장한다. 간단한 인사를 하신다. 회사 사정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온라인면접으로 대체하는 점을 양해바란다고. 나는 이렇게 말하는 속뜻이 무엇인지 안다. 그야 당연히 '청년인턴 주제에 뭘 굳이 회사 사옥까지 와서 면접을 보냐. 서로 편하게 그냥 온라인으로 대충 하고 끝내자'라는 의도를 돌려서 표현한 것일 테다.


다행히 면접은 스터디에서 예상한대로 그대로 나왔다.인턴에 지원하게 된 계기, 인턴이 끝나고 나서 본인의 계획이나 포부, 인턴기간 동안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지다. 나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 나만의 매뉴얼을 만들어 민원 처리를 잘해서 고객만족을 실현하고 싶다고 답했다. 과거 상사에 지원한 적은 있지만 해외영업이든 국내영업이든 영업은 영업이니까 어쨌든 고객을 만족시키는 게 첫 번째다. 성격도 쾌활하니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하게 답했다. 인턴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사실, 용돈이라도 벌려고 하는 거라고 솔직하게 답하긴 좀 그래서 사전에 회사가 어떤 사업을 하는지 한번 정도 읽어보고 부동산 개발이나, 해외투자 사업 쪽으로 역량을 개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했다. 무난하게 본 것 같다.


다음날 아침부터 문자가 왔다.


"00 공사 청년인턴 최종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래 일정을 참고하여 서류를 지참하시어 출근해 주시면 됩니다.

일정: 10월 2일 09:00 00 공사 본사 앞

복장: 비즈니스 캐주얼

제출서류: 재직증명서(해당자), 통장사본, 신분증


오!!! 다음 주부터 당장 출근이란다. 흠. 이걸 기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적어도 나이 30에 집에 처박혀 있지않고 용돈벌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은 덜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정규직이 아니면 어때? 이렇게라도 일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엄마한테 말하니,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꽤나 좋아하신다. 이렇게나 좋아하시는데 내가 만약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더라면 어떤 반응이셨을까? 부모님은 자식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다. 꽤나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해지는 순간이다. 대기업 다니면서 잘 나가는 친구들, 카톡에는 결혼식 사진만 올라오고, 애를 낳은 친구들 아니 최소한 안정적인 이름 있는 직장에 다니면서 연애라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면 괜한 열등감이 자리했는데 삶은 어떻게 풀릴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맞는 말이다. 낭떠러지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날 구멍은 있나 보다.


월급은 세전 2,096,270원이라고 한다. 엇? 생각보다 월급이 많네? 용돈으로 이 힘든 취준생활을 보내기 충분한 금액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충분함을 넘어 내게 과분하다. 어디 보자, 식비라 해봤자 한 달에 많이 잡아도 30-40만 원, 커피값 10만 원, 집에서 다니면 집값도 안 들 거고. 심지어 적금도 들 수 있는 금액이잖아? 인터넷에 쳐보니 아뿔싸. 그냥 최저시급이다. 괜찮은 꿀알바 하나 구한 거다. 젠장.

늘 하나만 생각하여도 둘은 모른다. 과거에 이 돈이면 이 정도 생활을 하고도 충분히 남았겠지만, 지금은 최저시급이 올랐고, 물가도 올랐고, 그만큼 내가 버는 월급의 가치가 높아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좋다가 말았다.

갑자기 민정 씨가 생각난다. 과연 민정 씨는 붙었을까?용기 내 스터디 카톡에 단톡을 보내본다.


"혹시 합격한 분들 계신가요? 조심스레 여쭤봅니다"


공무원준비를 오래 하셨다는 민지 씨는 '조용히 나가기'를 누르고 이미 나가신 지 오래다. 과거에 단톡방이 친하게 어울리는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을 더 돈독히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하면, 요즘은 오랜 지인이나 친구를 제외하고는 한 개인에게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만 이용하는 느낌이다. 그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바로 나가기를 누를 만큼 맺고 끊음이 확실한 거다. 각자가 해야 하는 역할도 분명히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조별과제를 한다고 치면, 단톡방에 속한 A가 단톡무리를 만들고, 관련 역할을 배분한 다음, 발표가 끝남과 동시에 폭파된다. 공적인 목적 이외에 사실 단톡방을 사용할 일이 크게 없다. 그게 심리적으로도 더 편하다.


단톡방에서의 사실 나도 그렇다. 나이가 30이 먹고 주변을 둘러보니, 각자 사는 형편이 20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벌어졌다. 단톡방의 인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머릿수가 많아지는 거니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니 눈치가 보인다. 아마 40대는, 50대는 더 벌어져 있겠지. 내 친구는 고작 30대 초반에 주식으로 2억, 3억을 번다. 주식에 넣는 시드 자체가 몇억대다. 누구는 의사명함을 달고 달에 2천만 원을 번다. 반대로 아래를 보면 급여가 2개월째 밀려 걱정하는 친구가 있다. 다음 달에도 급여가 밀리면 권고사직을 당할 것이 뻔하니,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미리 고심한다. 이들이 한 단톡방에 있다고 가정하자. 서로 기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돼 있다. 그 와중에 나는 이것도 인연인데, 큰 용기를 내 보는 거다.


"저 붙었습니다!!!"


공인중개사 형이 대답한다. 이 형은 왠지 될 줄 알았다. 전문성이 있는데 부동산 관련 공사에서 그것도 심지어 인턴을 뽑지 않을 이유는 없다. 곧이어,


"저도요!"


민정 씨도 대답한다. 공무원준비하는 민지씨를 제외하고는 다 붙은듯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하늘이 어떻게든 이 절실한 인생에 감동받아 용돈벌이라도 해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근무지도 같은데, 저희 6개월간 잘해보자는 의미로

점심이나 저녁 한번 하는 건 어떨까요?“


“좋아요”

“저 약속 있어요”


민정 씨는 언제나 단호박이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말도 안 했는데 약속 있단다. 당황스럽다.



지금 나는 동아줄을 잡고 있다. 그건 황금동아줄이 아니라 썩은동아줄이다. 그래도 이거라도 잡아야만 인생이 유지가 되기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썩은 동아줄이 끊어지는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잡고 버텨야한다. 이건내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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