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관계가 무서워

by 멜로디


나는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냥 나도 모르게 피해다닌다.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 아마도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느정도의 거리를 조절하며 유지하는 법을 터득했지만,

이성과의 관계는 늘 나에게 버거웠다.

남들에게는 시시한 일이, 나한테는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그게 자존심 상했다.


요즘 내 최애 미드인 프렌즈를 다시 보고 있는데,

문득 챈들러가 나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챈들러는 어린시절 불우한,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물질적으로는 꽤나 풍요로웠지만, 부모님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부모는 아이를 잘 돌봐주지 않았다.

외로움과 혼란 속에서 자라난 아이는 멋진 직장에 다니며 평범한 성인 남성인'척' 잘 살아가고 있었지만,

사실 챈들러의 내면에는 불안한 어린 아이가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걸 보여주는 단서 중 몇 가지를 이야기 해보자면

일단 챈들러는 조금이라도 어색하거나 불편한 상황에 처하면 그걸 참지 못하고 말도 안되는 드립을 자꾸 친다 ㅋㅋㅋ 어떻게든 모든 상황을 웃기게 만들어야만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고 할까?

그리고, 진지한 관계를 두려워한다.

30년 인생에 단 한 번도 장기 연애도 해본 적이 없다. 연인과 갈등이 생기면 바로 헤어질 것을 생각하고, 헤어지자는 말이나 거절도 잘 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도 없고,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뱉고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둘러댈 정도이다.


그리고 그런 챈들러의 모습이 마치 나와 같다고 느껴졌다.

물론 챈들러만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었지만,

나도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 늘 불안정했으며 부모가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와 같다는 느낌이나, 나를 보살펴주고 있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했다.

언젠가는 깨어질 것 같았던 가정은 실제로 깨어졌고, 그 이후로도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일들이 잦았다. 그리고 그건 모두 아버지 때문이었다.

기질적으로도 예민한 편이었던 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으며(언젠가 그게 청소년우울증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늘 불안하고 우울했다.


최근 몇 년간 심리와 관련된 책, 영상을 보면서 알게된 것은

나와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여자들 대부분이 나이 인종 상관없이 그런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 또는 가정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이성과의 교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해야할까?


다행히도(?) 나는 줄곧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 또는 나를 좋아해주는 누군가가 있었고 데이트할 상대가 있긴 했지만, 내면에서는 늘 상대가 사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는 나를 거절할 것이라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베이스로 깔려있었다.

주변에서 그 사람도 너를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고 이야기해도, 자꾸 의심만 들었다.

괜히 내가 다가갔다가 거절 당하고 창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기까지 한 적도 있다; (2000년대 로코 남주도 아니고)


그러나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 때문에 설레이고,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점점 깨닫게 되면서

두려워서 미리 발 뺄 그 시간에 그냥 내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그 사람을 온전히 바라봤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가 좋아질수록 더 불안했기에,

조금이라도 그 사람의 마음이 불분명해 보이면 도망치기 바빴다.

그럼 상처 받을 일 없을테니까.

그 사람이 마음이나 생각이 나와 완전히 같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그 사람이 나를 덜 좋아하는 것 같으면 나는 금새 '이 관계는 망했다! 도망가자!' 하면서 발을 빼곤 했다. 늘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기에만 바빴다.

그 사람을 알아가고, 나를 보여주고,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

나를 보여주는 것은 두렵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빨리 얻고 싶고 알고 싶었다.

마치 갖고 싶은 어떤 것을 쟁취하는 것에만 몰두한 아이처럼,

관계가 아닌 성취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목표지점에 다다를 때가 되면 나도 모르게 또 다시 도망가고 싶어했다.

갑자기 엄청난 분석력으로 그 사람의 단점만 파악하기 시작하고,

왠지 우리는 사귀어도 금방 헤어질 것 같다는, 그러니까 지금 그냥 끝내는 게 낫다는

회피형 끝판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난 원래 금방 질리는 성격이야, 내가 사람 보는 기준이 높은가보다' 하며 합리화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냥 누군가와 안정적인,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겁이 난다는 생각을 하기도 이전에 본능적으로 피해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늘 관계가 어긋나고,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점점 나에 대한 자존감이 낮아지고,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창피해서 그냥 대충 둘러대곤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내 마음을 회복시켜가면서 깨달았다.

이제는 상처 받을까 지레 겁먹고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고 싶다는 것.

그냥 그 사람을 보고싶다.

그 사람이 나와 같은 농도의 마음인지,

나에게 상처를 줄 사람은 아닌지

기둥 뒤에 숨어서 고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 부모 또는 가정으로부터 받은 상처나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다는 아니라고, 충분히 극복하고 회복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제 내 상처에 새 살을 덧입혀주고,

부러졌던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 볼 때인 것 같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상처가 있는, 결핍이 있는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오래된 상처와는 이별하고,

좋은 관계들로 삶을 더 풍요롭게 채울 수 있기를


그런 우리조차도 사랑해주고, 기다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아니, 오고 있다고 믿는다 :)



keyword
이전 05화원더풀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