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쏙 빼놓는 첫 날도 어쨌든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다. 둘째 날 아침. 가장 많은 일정이 예정되어 있는 날이다. 아니, 정확히는 많은 게 아니라 먼 길을 오가는 일정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나하 공항에서 남쪽으로 10분 거리. 오늘 우리의 일정인 추라우미 수족관은 오키나와섬의 북부에 위치해 숙소에서 차로 거의 2시간을 이동해야만 한다. 딱 좋다. 일본 운전에 완전히 적응하기 딱 좋은 날이다!
여행지에서 하루의 시작은 조식 타임부터다. 이곳의 조식은 다른 곳과는 조금 달랐다. 객실에 있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내려와 음식을 담아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레스토랑에서 먹는 사람들도 바구니에 담아 테이블로 가져간다.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객실에서 해결했다.
전날 밤 AI로 오늘의 일정을 미리 짰을 땐 1안과 2안을 마련했다. 1안은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하는 일정이고, 2안은 조금 여유롭게 9시 30분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웬걸, 조금 여유롭게조차 여유로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보다도 1시간 뒤인 10시 30분이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안타깝게도 둘째 날 오키나와는 내내 흐리거나 비가 내렸다. 북부까지 2시간을 가야 하는데 하필 빗길이다. 날씨라도 맑았으면 가는 길에 예쁜 바다 풍경을 즐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우선 검색한 데로 중간에 휴게소에서 판매하는 추라우미 수족관 할인티켓을 구하러 갔다. 네비를 따라갔는데 동선이 별로다. 올라갔다가 거꾸로 다시 2킬로가량 돌아 내려와야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올라가는 방향에도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곳에 주차를 하고 육교를 건너 휴게소로 왔다. 나만 몰랐다. 쳇.
도로는 거의 직진만 하면 되었던 터라 운전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수족관에 도착해서 주차장을 찾는데 좀 헤매긴 했지만 이 정도는 그냥 애교라고 생각했다. 조금 아쉬웠던 건 오후 1시에 돌고래쇼 공연이 있어서 그걸 보고 오후 3시에 있는 고래상어 먹이 주는 것을 볼까 했는데, 주차장에 도착한 게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냥 5시 타임 쇼를 보기로 하고 우리는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수족관에는 마침 1시 돌고래쇼가 끝나고 입장하는 사람들이 몰려 바글바글했다. 이게 물고기를 보는 건지 사람을 보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평일이라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역시 관광지는 관광지인가 보다.
무리와 함께 느릿느릿 관람을 하는데 아이는 이리저리 비집고 잘도 들어간다. 뒤에서 지켜보는데 혹여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조마조마하는 아빠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누가 사진을 찍든 말든 그냥 수조 앞으로 돌진했다. "아들, 잠깐만, 기다려, 뒤로와, 기다렸다가 보자, 야!" 속삭임 레벨부터 단전에서 올라오는 짧고 굵은 외침까지. 다양한 보이스 레벨을 쏟아낸 시간이었다.
느릿느릿 이동했는데도 고래상어가 있는 대형 수조 앞에 도착했을 땐 2시였다. 아직 1시간이나 남았다. 다른 데를 더 둘러볼까 하다가 이따가는 사람이 많아질 것 같아 그냥 자리를 잡고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아이는 점점 지루해서 미칠 지경이고, 결국 수족관 재미없다는 둥 가진 불만을 토로한다. 먹이 주는 체험장도 없어서 자기는 재미없다고 난리다. '아들아, 아빠 엄마는 10년 전부터 이 날을 기다렸건만! 이 감동 파괴자!' 어쩌겠나. 이럴 땐 유튜브가 최고지. 지루한 마음을 달래고 났더니 어느새 시간이 되어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3시가 되어서 고래상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우리가 앉은자리는 좀 위쪽이어서 그런지 정작 고래상어의 입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허리를 최대한 숙여도 보이지 않는 입. 아래에서도 입이 다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관 정도는 보였을 텐데. 이런 이런.
열심히 동영상과 사진을 찍으며 관람을 마쳤다. 감격의 순간을 다시 맞이하기까지 에너지를 너무 쏟아부어서 그런지, 감격보단 뭔가 긴장이 쏴악 풀리는 기분이었다랄까.
고래상어를 보고 나서 기념품점에 들러 인형을 사는데 또 거금을 들였다. 와. 솔직히 개인적으로 이게 제일 아깝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큰 거를 꼭 사야만 하는 아이의 고집에 오늘도 지갑은 점점 가벼워졌다.
그러고 나서 야외에서 본 오 끼 짱 쇼! 돌고래 쇼인데 이건 정말 언제 봐도 너무 재밌다. 돌고래와 사육사들의 케미가 보는 내내 웃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아이도 무척 좋아했다. 아무래도 아이에겐 고래상어보단 돌고래쇼가 더 맞는 듯하다. 약 10분 정도 진행되지만 음악도 신나고 준비된 퍼포먼스도 10분이 전혀 모자라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알찼다.
모든 관람이 끝나고 나서야 허기진 배를 달래러 근처 스테이크 하우스에 갔다. 이곳도 나름 많이들 찾아가는 곳이어서 그런지 검색하면 금방 나오는 곳 중에 하나다. 다행히 한국어를 하는 직원이 있어서 메뉴 주문도 어렵지 않게 했다. 배불리 먹은 만큼 지갑은 계속 배가 들어갔다. 그래도 아들이 맛있게 먹었으니까 그걸로 족하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아메리칸 빌리지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마침 12월부터 오후 5시 이후에 가면 크리스마스 조명 장식을 밝힌다길래 늦은 시간이지만 구경하러 잠시 들렀다. 10년 전엔 분명 거대한 관람차가 있어서 오키나와의 명물이었는데 지금은 철거되고 없었다. 하필 아메리칸 빌리지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9시가 넘어버려서 가게들 대부분 문을 닫았다. 유명하다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문을 닫아 그냥 가볍게 둘러만 보고 돌아왔다.
왕복 4시간의 긴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하루를 무척 알차게 보낸 기분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거의 11시가 다 되었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도 사고 맥주도 사 왔다. 아이는 먹고 싶은 과자와 아이스크림도 사고. 일본 하면 또 편의점 라면이 유명하지 않나. 짧은 3박 4일 일정이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해봐야 하니 편의점 라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도 진열되어 있는 상품이 뭔지 모를 때마다 사진을 찍어 AI에게 물어봤다. 진짜 라면 몇 개를 사진 찍고 물어봤는지. 컵라면 진열대 앞에 혼자 몇 분을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 해도 역시 외국어는 일단 할 줄 아는 게 최고다. 불편한 건 있지만 그래도 AI 덕분에 이젠 뭐든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 된 건 대단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재우고 아내랑 맥주를 마시며 내일의 일정을 짰다. 마지막 하루이지만 딱히 바쁘게 일정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왕복 4시간이 걸리는 북부로 가긴 좀 그렇고, 최대한 호텔 주변에서 보낼 수 있는 일정을 알아봤다.
근처 몰에 아이가 원했던 먹이 주기 체험을 할 수 있는 수족관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꽤 비싸다. 추라우미 수족관 보다 더 비싸기도 하고, 체험까지 다 하면 이건 뭐 그냥 탕진할 각이었다. 근처에 뭐 다른 곳이 없을까 알아보다가 야외 놀이터 중에 평이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일단 1안으로 점찍어 놓았다. 그리고 날씨를 봐서 2안으로는 아이가 내내 노래했던 해변에 가보기로 했다.
어디가 되었든 일단 제발 내일은 날씨가 좋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일기예보는 하필 또 비 표시로 되어 있는데, 제주도 날씨가 그렇듯 오키나와도 내일이 돼 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고된 하루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