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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이 Sep 19. 2022

우리 엄마가 고아가 되었다.

유학 생활의 가장 큰 괴로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고아가 되었고, 나는 엄마가 슬퍼하는 데에도 곁에 있어줄 수 없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것을,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다른 글은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은 물론 거의 매일매일 할머니는 어떻냐고 물어보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한국 시간으로 19일 자정을 넘기자마자 돌아가셨다고 한다.




코로나 상황에 넉넉하지 못한 유학 생활인지라 작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는 한국에 갈 수 없었다. 그때에는 이미 2년이 다 되도록 한국에 못 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자가격리 기간이 있건 말건 할아버지의 49재에 맞추어 귀국을 했었다. 정말이지 딱 내 자가격리가 끝나는 시점에 할아버지의 제사가 있었고, 거기에 참석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국에 가지 못한 것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딱 1년 만에, 정말로 딱 1년 사흘 만에 이번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지난 설날에 가서 뵌 게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번엔 49재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때에 나에겐 제법 큰 행사가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60세까지도 폐경이 오지 않았고, 예순여섯 까지 새벽 수영을 다니셨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이북식 김치를 만드셨다. 귀가 잘 들리지는 않으셨지만, 그것 말고는 정말로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셨다. 그런데 혼자가 되시고, 원래 사시던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이사를 하시고, 큰 이모가 먼저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조금씩 편찮아지셨다. 그래서 지난 이태 동안 내가 들은 소식은, 매일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낸다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할머니의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왜곡되거나 사라졌다. 치매셨다.


지난 설에는 나를 보고 몇 번씩 놀라셨다. 너 어디 갔다 왔냐고 몇 번씩 물어보셨다. 고모할머니가 계속 손을 잡고 형님, 얘가 둘째잖아. 공부하러 갔잖아- 하며 가르쳐 드려도 조금 지나면 또 놀라며 같은 질문을 또 하셨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 손으로 다 길러주신 그 애에게는, 계속 왜 넌 네 아빠랑은 안 닮았느냐고 하셨다. (그 사촌은 정말로 소름 끼칠 정도로 작은 외삼촌을 닮았다.) 나는 너무너무 자그마해진 할머니가 낯설고 속상했다. 할머니는 원래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분이셨는데... 왜 나보다 작아지고 마르신 걸까 하고.




추석이 되기 며칠 전에 꿈을 꿨다.

꿈에 우리 가족이 외삼촌 댁이랑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

할머니는 건강하실 때처럼 풍채가 좋았다. 입으시던 말끔한 옷을 입고 계셨고, 원래 쓰시던 그 커다란 안경도 쓰고 계셨다. 근데 그런 할머니를, 뒤에서 예쁘게 화장한, 역시나 건강할 때의 모습의 큰 이모가 안고 계셨다. 꿈이 너무 생생 했다. 나는 큰 이모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독일에 있었던 터라, 큰 이모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큰 이모는 아무도 못 보고 나만 봤다. 그래서 할머니가 나한테 왜 우냐고 했다. 내가 "큰 이모가 왔어. 큰 이모."라고 하니까, "으응, 그래? 큰 이모가 왔어?" 하고 웃으셨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웃으시며 놀라지도 않으셨다. 이모가 할머니를 뒤에서 꼭 껴안고 있었는데...


돌아가신 분이 꿈에 좋은 모습으로 나오고, 식사를 같이 하는 건 나쁜 꿈이 아니라고 했다.

꿈에서 깨자마자 망설이다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엄마가 그렇잖아도 절에서 법사님한테도 엄마랑 할머니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나까지 할머니가, 심지어 큰 이모까지 나오는 꿈을 꾸었다니 희한하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기제사나 해야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었다.

그리고 딱 보름만이다.

큰 이모가, 할머니 안 외롭게 모시고 가려고 하셨던 걸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종종 무서워진다.

과연 지금 내가 공부한답시고 온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강렬하다. 그냥 엄마 아빠 곁에서, 적당한 회사 다니며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면 적어도 엄마 아빠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언니가 시집가던 해.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가 그렇게 늙지 않았었는데...

2년 만에 만났던 올 2월 부모님은 너무 많이 늙어 계셨다.


이 시간들이 무섭다.

우리 엄마가 고아가 된 것처럼, 나도 언젠가 고아가 될 것이다.

고아가 되는 날 나는 분명히 내 삼십 대의 몇 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하지 못했던 이 시간을 후회할 것 같다.




공부는 하면 된다.

넉넉하지 않은 게 아니라 부족한 형편이지만,

나는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를 쓰는 나라에 와 있지만,

그래도 사는 건 어떻게든 살아진다.


그런데 이 시간에 늙어가는 부모님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 몇 번씩 나 혼자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괴롭다. 혼자서 슬퍼하는 건 외롭다 못해 괴롭다. 사람들이 함께 슬퍼하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지, 혼자서만 슬퍼한 적 없는 사람들은 모를 거다.


우리 집 어른들은 전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한국 전쟁 때 이남으로 피난을 오셨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과 인천에서

각각 최선을 다해서 사 남매, 오 남매를 기르셨다.

광복, 전쟁, 독재, 군부정권, 민주화, 서울 올림픽, IMF, 월드컵, 오일쇼크, 평창 동계올림픽, 코로나...

한 사람이 다 겪은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삶을 사셨다.

이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몇 시간 동안 펑펑 울면서 어떻게 해서든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보는 게 전부다. 내 몸속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의 미토콘드리아가 온몸을 따끔거리게 하는 슬픔을 느끼면서.


왜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로울까.


진짜로 무섭다. 외롭고, 슬프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그냥, 이제는 내가 자식처럼 돌봐야 할 내 부모님을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돌봐주고 싶다. 이제는 고아가 되어버린 우리 엄마와 아빠는, 나 말고는 돌봐 줄 부모님이 없으니까. 나중에 다시 나 혼자 사무치게 그리워할 내 부모님이기에. 나는 자식이니까.




할머니, 편안하게 주무세요.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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