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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tyle by AK Oct 04. 2024

영어와 남편

나를 요상하게 변화시킨 주범, 영어와 남편



나는 성격이 너무 많이 변했다. 원래 나는 진지한 이야기는 10분도 못 버티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 이전엔 개그 욕심까지 좀 있어서 재미있는 사람이란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런 나를 과묵하고 무미건조한 사람으로 만든 두 주범이 있었으니, 바로 영어와 남편이다.


미국에 온 지 28년 차인데도 영어는 여전히 너무 어렵다. 영어 교육을 전공했고, 30대 초반에 미국에 와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는 내게 여전히 도전이다. 나는 영어 성장기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과정을 거쳤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는 단계, 이제 조금 들리는데 말이 안 되는 단계, 조금 말이 되나 싶다가 다시 잘 안 들리는 단계, 드디어 말은 하지만 시제가 다 틀리는 단계... 끊임없이 이 과정을 반복하며 조금씩 발전해 나갔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고민하던 힘든 시기를 지나왔다.


대학 수업은 그나마 따라가기가 쉬웠다. 교수님들이 표준 영어로 강의를 하니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업은 별거 아니네?" 하고 자신감을 얻었지만, 친구들과 대화를 시도하려 하면 말이 너무 빠르거나 속어가 난무하거나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너무 많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국어로 예를 들자면, 가령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라든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표현을 원어민이 아니면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화에 끼어들 수 없게 되고, 내 말수는 줄어들며 점점 과묵해져 갔다.


미국의 대학원에서는 주로 토론을 많이 한다. 아주 작은 주제나 질문에도 열심히 토론을 한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이 미국인들은 정말 토론을 좋아하는 것 같다. 토론이 많은 수업에서 한 번은 작곡과 교수님이신 Dr. Furman께서 왜 토론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마디 하려고 하면 이미 주제가 바뀌어 있고, 또 입을 떼려면 벌써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네요."

교수님은 당황하셨지만, 이후로 한 학기 내내 나를 이해해 주셨다.

영어가 이렇듯 나를 과묵하게 만들었지만 한인 교회를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말하는 즐거움을 알고 있었더랬다. 그러나 미국인 남편과 그의 영어만 쓰는 친구와 가족들 사이에서, 이제는 그저 듣는 데 힘쓰고 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원래 말의 90%가 농담이었던 사람이었다. 가끔 미국인 중에서도 유머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기발한 농담을 해가며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능력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 정말이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이유는 바로 내 남편, 스티븐 때문이다. 스티븐은 본인도 농담을 잘하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인데, 그의 농담은 나와 결이 다르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비현실적인 농담으로 웃기려 하는데, 스티븐은 그런 말을 정확하게 고쳐주고야 마는 사람이다. 변호사답게 모든 말이 사실에 입각해야 하고,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선택해서 말해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두리뭉실하게 말하거나 엉뚱한 얘기로 농담을 하면, 그는 꼭 일일이 바로잡는다. 오죽하면 시누이가 그를 'Word Watcher'라고 부를 정도다. 매번 농담할 때마다 지적을 받으니, 자연스럽게 농담을 덜 하게 되고, 지금은 아예 농담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누구랑 같이 있어도 재밌게 해 주고 웃길 자신이 있었는데 내 농담을 올바르게. 정확하게 고치는 사람이 내 남편이라니!! 완전 폭망했다. 영어로 생활하다 보니 영어 실력은 아주 조금 늘었지만, 내가 농담으로 웃음을 주던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나도 한국어를 엄청 잘하던 때가 있었다. 미국에 와서 정착한 한인 교회에서 나는 키보드를 맡으며 찬양팀에 속해 있었는데 그때 찬양팀 멤버끼리 주거니 받거니 농담 케미가 진짜 좋았다. 다들 유머 감각이 대단해서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나의 실없는 유머도 잘 먹히던 그룹이었다. 어찌나 농담을 많이 했던지 몇 년 후 한국에 돌아가 친구들을 만났을 때, ‘넌 미국에 사는 애가 한국말을 왜 이렇게 잘해? 너 한국말 학원 다니니?’라고 할 정도였다. 역시 갈고닦으면 못할 것이 없다.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려면 1. 학교에 다니거나, 2. 미국인 남자친구를 사귀거나, 3. 직장에 다니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데, 나도 미국인 남편 덕에 영어가 늘긴 했다. 우리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수다쟁이 우리 남편이 하루 종일 말하는 걸 듣고 며칠 지나자 "나 영어가 좀 들리는 것 같아"라고 하셨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영어가 느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잃어버린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수년을 힘들게 보냈다. 농담을 좋아하던 내가 이제는 정확한 사실만 말하고 살아야 한다니… 이건 내가 아니다.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이런 이유로 한때는 진지하게 이혼을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한국 친구들을 만나 다시 농담도 하고 나 자신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과묵하거나 정확한 말만 일삼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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