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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탑층을 향하여

탑층을 향하여


퇴근한 남편 손에 무늬 없이 새하얘서 눈에 띄는 상자가 들려있다. 기념일 어디에도 ‘해당없음’ 날이란 걸 시선을 맞추는 짧은 순간 빠르게 확신한다. ‘HANS’라 새겨진 케이크 상자, 내 손에서도 남의 손에서도 흔한 파리바게뜨 투썸플레이스 배스킨라빈스가 아니라서 반긴다. “웬 케이크? 회사에서 준 거야?” 현관 거울 앞 벤치에 상자를 얌전히 올려놓고는 본인 몸만 들어온다. “아니 샀어. 위층 갖다주려고.” 40이 넘은 나는 4살 아이가 되어 서운함도, 싫은 내색도 숨기지 못하고 유치해져 버린다. “왜? 뭐가 예쁘다고?” 귀가하는 구성원을 위한 기본 예의, 우리의 원칙인 마중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 저녁 준비를 한다. 두부가 들썩이며 김치찜이 끓고 있지만 열기 없는 인덕션을 대신해 내 몸에서 화가 끓는다. ‘층간소음 유발자’ 25층을 향해 남편은 세심하게 장식된 케이크를 떠올렸고 난 적확한 비난의 단어로 마지막 일격을 고심하는 중이었다. 확실한 해결보단 당장의 감정 해소만 쫓은 민낯을 들킨 것이 부끄러운 걸까. 좁고 얕은 속을 파려는 듯 끓고 있는 김치찜을 마구 뒤적거린다. 


‘평온을 앗아간 낯선 이가 윗집에 산다’ 뻔한 공포 영화의 포스터 문구, <침입자> <불청객> <낯선 방문>이 제목 후보군이다. 흥미조차 끌지 못할 상투적인 설정이 요즘 나에겐 결코 가볍지 않다. 명백한 원인과 양보 못할 목표를 위해 상대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 아침저녁으로 빽빽한 지하철 객실에서 의도한 어깨빵을 가하는 상대는 매일 얼굴을 달리하는 다수라 잊는다. 정해진 시간 동선마저 그려지는 일정한 패턴, 진원지가 위층인 소음과 진동은 대상자가 단 한 사람으로 특정되기에 해결해야 한다. 25층 아이의 기상 시간, 잠투정을 포함한 취침 시간까지 원치 않는 정보를 습득한 날들을 견디며 지낸다.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방식과 과정은 가장 나다워야 한다. 태도와 말투는 그가 가진 가치의 모든 것을 말한다. 예의 없는 행동, 휘청거리는 가벼운 몸짓, 불필요한 웃음, 티 나게 높은 목소리를 주의한다. 내 모습 어느 하나가 그 경계선에 닿으려 하면 알림이 울리고 몸을 멈춰 세운다.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확실한 거부와 반대를 표출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꼼꼼한 준비 자세를 취한다.


최초의 의사 표현으로 A4용지에 ‘맑은고딕체’가 아닌 명조체 계열로 글꼴을 선택하고 크기도 12로 키운다. 특징 없이 표준화된 양식 안에 감정을 배제한 사실 위주의 글쓰기를 한 페이지에 채워 두 번 접는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한 층 오른다. 현관문과 거리가 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기둥 가운데 종이를 단단히 붙인다. 다음날 출근하려 문을 열자 봉투가 발끝 앞에 떨어진다. 우리집 현관문에 깊게 꽂아놓은 내용과 어울리지 않을 핑크색 편지 봉투다. 무려 손글씨로 눌러 쓴 꽉 채운 편지 두 장은 정성과는 먼 시각적 공포와 압박으로 느껴진다. 확인하기 싫어 열지 않은 검은 봉지 같은 편지를 상황 파악을 위해 마을버스 안에서 꾹 참고 마지막까지 읽는다. 적지 않은 비용(수십만 원)을 들여 매트 시공까지 했다는 자기변호는 다음 장부터 ‘서운하다’는 감정 호소에 더해 아이를 그럼 묶어두어야 하냐는 이해할 수 없는 격한 표현으로 이어진다. 반듯하고 절제된 문어체로 위기를 회복하려 했던 내가 안쓰럽다. 상대는 나와 첫 계단부터 마지막 계단까지 다른 이었다. 폭력적인 손편지를 받은 날 이후 남편이 케이크를 들고 온 날까지 인터폰 ‘세대간통화’를 누른 건 세 번이다. 모두 밤 11시를 넘긴 시간이었고 한 번은 응답조차 없었다.                


외투를 벗은 남편은 손을 씻고는 식탁에 앉는 대신 케이크를 들고 다시 현관문을 나선다. “너무 늦으면 안 되니 저녁 먹기 전에 주고 올게.” 밤 11시에도 뛰느라 안 자는 집인데 무슨,,,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참는다. 위층에 대한 분노가 내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공격이 되는 걸 막는다. 오늘 올해의 마지막 퇴근길에 단골 디저트 가게에 들러야겠다. 생일에도 홀(Hole)케이크를 즐기지 않는 우린 나와 남편이 좋아하는 초콜릿, 아이가 좋아하는 딸기 셋이서 두 조각이면 충분하다. 달콤 부드러운 케이크 한 입 덕에 행위주체자를 나로 가져와 반대의 제목을 떠올릴 것이다. <탈출> <탑층을 향하여> 파국의 스릴러가 아닌 더 큰 욕망을 손에 넣은 해피엔딩이다. 편지도 카드도 아닌 짧은 메모를 남겨야지. Thanks. 덕분에…


December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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