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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가을 홍보

가을 홍보


손 끝이 시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출근길 버스를 기다린다. 전광판에 ‘잠시후 도착’이 뜨고 3분이 넘지 않을 체감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허전한 양손을 팔짱하고 늑골과 겨드랑이를 자꾸만 만지작 한다. 가을 흙냄새도 맡을 새 없이, 재킷에서 코트로 건너 뛸 만큼 갑자기 겨울이 와 버린 건 아니겠지. 찬바람이 불면 먹어야 하는 엄마의 뭇국과 묵은지가 들어간 뻑뻑한 비지찌개도 아직 한 그릇 먹지 못했는데. 사방에서 내뿜는 여름 열기에 지쳐 서늘한 공기가 반갑다고 외친 게 얼마 전이다. 며칠 만에 냉랭한 겨울 낯으로 표정을 바꾼 날씨에 조바심이 난다. 출퇴근길 마주하는 가로수와 열차 창밖으로 지나치는 산이 대부분 초록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다. ‘아직 단풍도 절정이 되려면 보름은 남았어. 서운하지마!’ 가을이 이미 떠났을까 조급해하던 마음을 팔짱 낀 손처럼 꽉 붙잡아 놓는다. 모처럼 야근이 아닌 퇴근길, 오늘은 꼭 가을맞이 청소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계절이 바뀌면 필수적인 옷장 정리라 하지만 별다를 거 없이 싱겁다. 선반에 안쪽 깊숙이 이중 주차되어 있단 두꺼운 긴팔 옷들을 앞줄로 빼내고 바로 보였던 얇은 여름 옷은 뒤로 밀어 넣는 열과 행의 재배열 정도다. 정돈된 상태 유지에 집착할 뿐 완벽하고 효율적인 수납 스킬은 보유하지 못한 게 나니까. 아이보리 베이지 페일핑크,,, 비슷한 재질과 색상에서 디자인만 다른 상의를 하나 빼낸다. 최근 최근 구매한, 총 길이가 짧아 나를 당황하게 만든 카디건이 손에 집혔다. 하루의 대부분을 PC모니터에 머리가 닿을 듯 상체를 들이민다고 허리가 길어졌을 리 없다. 구매한 사이트에 들어가 상세 사이즈를 보고 나의 다른 옷들에 비해 10cm 이상 짧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다. 제품 설명에 크롭 스타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나보다 한참 큰 모델 컷에서도 눈치 채지 못한 나의 실수다. 애정 하는 계절에 정신을 빼앗겨 내 허리를 드러내게 생겼다. 크롭 패션의 유행은 여름을 지나 가을, 어쩌면 겨울에도 이어지려나 보다. 긴팔 상의 운동복을 주문하려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스토어에 들어가도 소매길이만 길어졌을 뿐 여전히 제품명은 ‘크롭 탑’ ‘크롭 집업재킷’ 이다. 때이른 추위가 찾아온 출근길, 트렌치코트 안으로 손을 넣어 허리를 감싼다. 새 카디건 탓에 맨 허리가 손끝에 살짝 닿는다. 일교차가 15도 안팎으로 벌어지는 날이라 했던 걸 떠올리며 짧은 후회를 한다. 스커트를 바짝 올리고 상의는 늘어나라 아래로 당기며 불운한 나의 새 옷은 주인을 잘못 만나 5cm는 길어져 버릴 거다.


연말을 앞둔 게 큰 이유지만 면담하기 좋은 가을이다. 쉼 없이 이어 온 직장 생활의 비결에 대한 질문을 동료뿐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종종 받는다. 매일이 성취의 순간이며 성과의 기록일 수는 없다. 멈추지 않는 힘을 믿고 채워왔던 하루 하루였기에 특별한 know-how는 없다. 오늘따라 마음에 드는 출근 복장, 집 밖으로 막 나섰을 때 딱 좋은 공기의 온도와 일조량 정도면 하루를 시작할 기운을 내기 충분하다. 나와 같은 욕심 없는(?) 직장인에게 가을은 유독 애정 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계절이다. 수집하듯 모은 색상과 짜임이 다른 트위드재킷을 번갈아 맘껏 입을 수 있다. 한여름에도 모닝커피는 카페라테인 터라, 뜨거워도 놓치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바꿔가며 겨우 잡았던 생명수다. 이제는 차가운 손끝을 따뜻하게 해 주는 핫팩 기능도 누리며 소중히 더 꽉 움켜쥘 수 있어 반갑다.


06:40 평소와 같은 시간대 버스정류장에 서서 가볍게 목운동을 한다. 일출시간이 매일 1분쯤 늦어지는 10월이라 버스를 기다리며 주위가 눈에 띄게 환해지는 순간을 지켜본다. 동시에 밤새 빛을 내던 가로등이 한꺼번에 꺼지며 출근하는 나에게 바통 터치를 한다. 모든 이의 하루 시작을 알리는 소리 없는 기상 알람 같다. 가로등이 모두 소등되고 온전히 햇빛만 남은 이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본 목격자가 나라는 상상에 즐겁다. 깊어진 가을의 신호를 또 하나 발견하려 이번 주말 백운호수로 달리기를 가야겠다. 레깅스에 니삭스 하의는 젊은 러너들과 다르지 않지만 크롭티 대신 엉덩이를 완벽히 가려줄 긴 티셔츠와 바람막이를 안전하게 입고서 말이다.


October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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