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 없는 부부지만 저녁 식탁 마주 보는 자리 배치는 불변의 원칙이다. 어느 한 명의 부재라면 모를까 부부의 지정석은 아이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밥 먹자는 부름에 무심코 내 자리에 앉던 아이는 민망해하며 튕기듯 옆 의자로 엉덩이를 옮긴다. 서로가 마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저질의 효율적 동선 때문이다. 아직 맵기 조절이 필요한 아이 덕에 단출한 세 식구지만 완벽한 메뉴 일치가 아닌, 아이 앞엔 옵션B의 반찬이 놓인다. 식탁에 올라왔으니 소주 한 병도 메뉴라 할 수 있지. 주기가 짧아지다 이젠 격일 간격 반주를 하니 마주 앉아야 마시기 편하다.
한 병을 탈탈 털어 나눠 마신 소주 네 잔이라고 특별히 대화가 길어지진 않는다. 단조로운 아이의 일과를 확인하는 걸 시작으로 학원 데일리 테스트 결과를 묻는다. 점수 또는 틀린 개수를 들으며 응원으로 포장한 꾸지람을 덧붙인다. “나 8일 회식이라 늦을 거야.” “무슨 요일이지? 나 다음 주 쭉 야근일 거 같은데,,, 수요일은 안 해야겠네.” 각자의 새로운 일정 공유와 협의된 날짜를 재확인하는 남편과의 대화 또한 분명한 숫자로 채워진다. 시간, 버스/지하철노선, 일정표, 견적서,,, 빼곡한 숫자만 바라보는 하루를 살고 있다. 감정과 서사의 흐름대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사고’라는 걸 하고는 있나? 수식이 저장된 촘촘한 셀에 실수 없이 숫자를 입력하다 키보드 위 손을 멈추고 두려울 때가 있다.
숫자 세상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난, 감각 기관까지 각인된 듯 특정 숫자에 무조건적 반응을 보인다. 출근 중인 7시 대, 35와 45의 숫자 차이는 크다. 도착역에 내려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핸드폰 시간을 확인한다. 대부분 32분에서 35분 범위 안에 있다. 10분의 차이지만 42분이면 겁나 빠른 진아씨로 변신, 맹렬한 기세로 앞선 사람을 따라잡는 상대는 모를 나 홀로 경보 시합을 한다. 45분이면 안타깝지만 매일 들르는 매장의 카페라떼마저 포기해야 하는 불운의 날이다. 8시부터 꼼짝 않고 모니터만 바라보다 고개를 들면 어김없이 3시간쯤 지나 있다. 톨사이즈 커피잔의 카페라떼도 마지막 한 모금이거나 이미 비고 없다. 그제야 화장실 다녀와야지 하며 숫자와 영문이 빼곡한 모니터에서 눈을 뗀다.
2년 전부터 도입된 동네 도서관 무인대출 예약시스템은 나에게 주어진 특혜라는 착각이 든다. 도서관 운영시간이 끝나도 예약한 당일 17시부터 다음날 17시까지 24시간 안에만 무인예약기에서 책을 찾으면 된다. 퇴근하고 돌아가는 밤, 출근길 10분 정도 일찍 나서 깜깜한 무인예약 대출기 앞에 서면 독서가라도 된 기분이다. 서사 결핍 내 기계적 일상에 감정 가득한 문장을 긴급 수혈하려, 요즘 많이 거론되는 소설 2권을 무인대출 신청한다. ‘네모의 꿈’ 가사 속 둥근 지구에 사는 네모의 일상을 떠올린다. 이야기 가득한 삶을 꿈꾸면서 숫자 세상에 사는 나, 선 채로 졸린 눈을 껌뻑이며 들고 있는 책 몇 페이지를 애써 읽는다. 휴대폰 화면에 07:40, 긴장하여 책을 가방 깊이 넣고 하차를 위해 열차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린다.
February 04,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