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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Jun 07. 2023

낡은 피아노를 대신할 소확행

낡은 피아노를 대신할 소확행


계절의 바뀔 즘 방문하는 구. 나의집, 현. 친정은 시간의 흐름을 빗겨 난 변화란 없는 곳이 되고 있다. 책장에 순서대로 나열된 수십 권의 사진 앨범은 매번 아이와 꺼내 보곤 다시 같은 자리에 꽂는다. “와, 이 아이가 정말 엄마라고?” 사진 속 촌스럽거나 장난기 있는 엄마 모습 놀리기가 시들해지면 아이는 내 방으로 달려간다. 온기 없는 방, 여전히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피아노에 앉아 힘겹게 뚜껑을 연다. 가장 자신있는ㅡ나도 계이름을 외우는ㅡ소나티네 OP.36 No.2 3악장부터 No.3 1악장까지 뽐내듯 치다 뻑뻑한 건반을 탓한다. 20년 넘게 조율 안된 피아노라 괜한 핑계는 아니다. 그땐 평범했을 레이스 달린 피아노커버와 위를 채운 빼곡한 인형들이 먼지 없이 새하얗게 관리되어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빠의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간 업라이트 삼익피아노는 이제 아이의 방문이 아니면 소리를 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원래 주인인 난 피아노에 앉기보단 아이의 연주를 들으며 또 다른 책장 앞에 선다. 추가되지도 빠질 리도 없는 변함없는 책들 사이 한 권이 눈에 띈다. 분명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을 텐데 어릴 적엔 몰랐던 작가의 낯선 책을 발견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이라 적힌 책등을 보자마자 뽑아 든다.


1997년 초판 1쇄,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모음집이다. 다음 방문까지의 장기 대여 대신 양도를 요청한다. “엄마, 이 책 아빠 거예요, 엄마 거예요? 내가 가져간다!” 얼마전까지 신조어라며 온갖 곳에 쓰였던 ‘소확행’, 그 표현이 내 손에 들려 있는 25년 전 수필집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그의 글에는 진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장면들이 까슬까슬 거칠지만 빼곡하다. 갓 나온 뜨끈한 시장 두부, 분식집에서 눈치 보지 않고 시키는 맥주, 백수로 의심받는 한낮 산책, 중고 책방의 먼지 냄새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남용되듯 매일 한 번은 보고 듣는 내 주변의 단어와는 분명 다르다. 우리 동네 맛집에 검색되는 음식점 상호에도 ‘소확행’이 들어가니 말이다. 소소함의 정도에 개인차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소확행이라 태그 된 사진과 글은 작고 적은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명품 구매 새 차 선물,,, '네, 당신에게 확실한 행복일 순 있지요. 그런데 정말 소소한 건가요?' 특정 못한 대상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답을 듣는다고 거부감과 불편함이 해소될까 만은. 그들에게는 (大,뽐내다 자랑하다의 뜻이 있으니)대확행, (夸,자랑)과확행이란 말로 콕 집어 교정해 주고 싶다.


나만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나열하려다 자체 필터링을 한다. 진심이라 꺼낸 것들이 하찮게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가장 개인적이기에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확신도 용기도 부족한 탓이다. 마을버스-지하철4호선-환승1호선 탑승 시간이 딱딱 맞아 여유로운 출근 길, 추가 자료 제출이나 보완 요청 없이 한 번에 승인 난 보고, 퇴근 후 생수 대신 벌컥 들이켜는 캔맥주, 네 단락 보기에 깔끔히 채워진 이번 주 글 한 페이지가 완벽히 내 거이자 확실한 행복이다. 일요일, 아이스박스에 꼼꼼히 포장된 '할머니표 김장체험키트'를 받고 할 말을 잃는다. 내가 준비했다면 유난스러운 일도 손녀를 위한 할머니의 세심함이면 정성 가득한 깜짝 선물이 된다. 특별히 속 노랗고 포기 작은 절임배추 네 쪽과 김치소인 무채는 별도 용기에 넉넉히 담겨있다. 10분도 채 안 걸린 짧은 김장 체험, “김장 끝~! 엄마 나 너무 잘 한다. 내년엔 범박동 가서 같이 해야겠어.” 옴마야~ 허리 아프고 다리 저려서 다신 못하겠단 말이 나왔어야 하는데 고작 한 포기였던 게 문제였네. 매운 걸 못 먹으면서도 ‘쓰읍 흐읍’ 거리며 자꾸만 무채를 한 가닥씩 집어먹는 아이는 벌건 얼굴로 내내 즐거워한다. 김장 소감을 나누며 영상 통화하는 아이와 할머니에겐 이 순간이 소확행이다.


소중한 한 포기의 올겨울 김장을 냉장고에 넣으며 부모님은 절대 직접 처분 못할 자리만 차지한 내 방 피아노를 떠올린다. 소유권은 없지만 처리할 사람은 나뿐이다. 피아노 중고 매입을 한참 검색하여 연락처를 몇 개 저장한다. 어떤 사물이든 들어가면 다신 나올 수 없는 친정에, 피아노 보다 크기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 변화를 고민한다. 안마기도 손사래치시려나? 아, 아빠가 커피가 자꾸 좋아진다며 에스프레소 머신을 물어본 적이 있던 거 같다. 출퇴근길 동행한 가방 속 무라카미 하루키 책은 원래 있던 친정 책장에 꽂아 두기로 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필요로 하는 날이 오면 다시 내 눈에 띌 것이다.


November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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