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카인드>를 읽고
첫 번째로, 우리는 작가에 대한 배경과 사상을 살핀다. 이후 <휴먼 카인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곱씹어서 이해한다. 다음으로 책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남은 질문들을 논한다.
PART 0 : 원래 망치로도 건축한다.
책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무엇일까? 각자 읽기를 멈추고 생각해보자. 저자가 학습해왔던 개념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하나의 단어가 뇌리에 맴돌았다.
망치, 이 책은 망치다. 대전의 한 교수님이 했던 비유도 재치있다. 하지만 이 책은 뒤통수를 내리치는 죽비보다는, 머리를 깨버리는 망치에 가깝다. 저자는 니체의 망치를 휘두르며 인간 본성에 대한 ‘사실’들을 부셔버린다. 좋은 책을 정하는 하나의 기준은 “당연한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는가”이다. 이 책은 착실히 그 역할을 해냈다.
물론 여기서도 안타까운 점은 잔재한다. 그것은 바로 그의 망치가 ‘비상탈출망치’라는 점이다. 저자는 연기가 새고 있던 성악설이라는 버스를 세웠다. 망치를 들고, 과학과 역사로 코팅된 창문들을 모조리 부셨다. 가까스로 사람들을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저자의 망치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건축해줄 수 없는, 탈출용 망치였다
브레흐만의 책은 흥미롭지만, 사실이기에 믿기보다, 믿고 싶은 사실을 주장하는 것에 가깝다. 재해석의 필요성을 타당하게 주장했지만, ‘새로운 현실주의’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 니체의 철학을 빌려 말하면, 그는 ‘파괴’했지만, ‘창조’하지 못했다.
주장하면 언제나 논증해야한다. 먼저, 나는 작가의 사상이 형성된 배경을 먼저 훑겠다. 다음으로, 작가의 주장을 해체하고 흐름을 읽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의 허점을 노리겠다.
PART 1 작가에 대하여
활시위를 당가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과녁을 보는 것이다. 먼저 과녁의 좌표를 정확히 인식하고, 원판의 중심을 또렷하게 노려 봐야한다. 물론, 이대로는 부족하다. 고은의 <화살>처럼,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핵심에 꽂히기 위해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해야한다. 텅 비어 보이는 허공 속에서, ‘편견’을 감자. 한 쪽 눈을 가늘게 뜬 상태로, 저자의 배경과 사상이라는 바람을 느끼자. 그래야만 조준이 의미있어지며, 비로소, 화살이 날아가 강하게 박힌다.
우리는 책이 던지는 단편적인 메시지뿐만 아니라, 저자의 학문적 배경과, 저자의 사상을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가의 목적을 추론할 것이다.
학문적 배경
저자는 위트레흐트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본래 그는 학계로 들어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계기는 금융위기다.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언론은 경제학자들에게 해결 방법을 자문했다. 저자는 이런 언론의 모습이 이해가지 않았다.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금융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저자는 미디어라는 무대에서, 새로운 역할의 필요성을 느꼈다. 현재에 발생하는 일이 발생한 이유를 설명할 역사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학계를 떠나 언론으로 항했다. 중도좌파 신문에서 일하다가 기본 소득을 제공하고 ‘작문의 자유’를 제공하는 언론 플랫폼에 합류했다. 현재 그는 역사가답게. ‘보편적 기본 소득의 정책사’ 등과 같은 실증적 사료 연구를 바탕으로 한 심층보도에 주력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작가의 책, 사상, 성향
총 4가지를 살펴볼 것이다. 첫 번째는 가장 최근의 책인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다. 그는 책에서 3가지를 주장한다. 그것은 (1) 국경개방, (2) 기본 소득 지급, (3) 주당 15시간 노동이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이 꿈꾼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현금이 무상으로 지급되고, 사람들은 주당 15시간 노동으로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얻는다. 나아가 국경을 개방해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나라를 넘나들 수 있다.
두 번째는 정부 주도형 경제 발전이다. 그는 “이것은 자본주의를 구하는 문제다. 혁신의 대부분은 정부 지출을 통해 이뤄졌다. 2차 대전 이후의 황금기에는 재산과 부동산, 상속 및 최고 소득에 대한 세율이 현재보다 훨씬 높았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을 길들이려면 우리에게 현재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단언했다.
세 번째는 참여민주주의이다. 휴먼 카인드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미래 사회의 정치 시스템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는 그가 주장을 준비하는 방법이다. 사상하고는 경향이 멀지만, 저자가 정보를 받아들이고, 가공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자료를 고를 때 변호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고객을 변호하는 것처럼 내 의견을 변호하기 위한 자료를 많이 준비한다. 내 의견에 반하는 기사를 쓴 동료 언론인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내 의견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는 동료나 독자가 오히려 내 의견을 증진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적으로 통일된 의견을 내놓겠다는 마음과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버트런드 러셀도 “바보와 현자의 차이점은 바보는 자기 확신이 가득하고 현자는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듯이, 자기 의견이 항상 나쁘다거나 미쳤다고 할 필요는 없지만, 자기 의견을 의심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서 구경만 하는 똑똑한 사람도 되지 않아야 한다.“
작가의 저술 목적
위 내용을 정리해보자. 작가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무엇인가? 국경개방, 참여민주주의, 기본 소득, 주당 15시간 노동이다. 단어들을 곱씹어보자. 이것들을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슨 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는가? 그것은 바로 ‘선한 인간 본성’이다. 저자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체가 믿을만한 존재여야한다. 인간 본성이 선하고 친절해야만 우리는 믿고 권리를 이양할 수 있다. 즉, 저자의 정치적 주장은 인간이 폭력적이거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라면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작가의 저술 목적을 추론하기 위해서, ‘선한 인간 본성’과 ‘유토피아’의 관계를 생각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이 선하므로,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가치에 맞게 사실을 해석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특히 사회과학자 사이에서 말이다. 때문에 나는 반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의심한다. 한 마디로, “그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실현되어야 하기에, 인간은 선해야한다”는 것이다.
PART 2 <휴먼 카인드>에 대하여
작가를 분석한 이유는, 책을 넘어 그의 사고 세계를 알기 위해서다. 우리는 비판을 던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첫 단계를 끝냈다. 이제 두 번째 단계다. 책을 꼭꼭 소화시켜보자.
<휴먼 카인드>는 아래 한 문장을 받아들이도록, 절실히 간청하는 책이다.
”인간은 내심으로는 상당히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친절하며 선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책의 논리적 흐름, 전달하고 싶었던 핵심을 정리할 것이다.
책은 총 5부로 되어있다. 1부에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고상할’ 수 있는 진화적 이유와 실례를 제시한다. 하지만 1부까지만 읽으면, 독자들의 머릿속에 온갖 의심이 든다. 인간은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악을 분명히 경험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진행된 심리학 실험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한다. 책이 역사와 모순되며, 작가의 편협한 생각일 뿐이라는 유혹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물론, 작가도 안다. 작가는 기다렸다는 듯, 2부와 3부 대부분을 반박에 할애한다.
2부에서는 과학의 이름으로 실행되고, 언론의 가호로 진실이 된 것들에 주목한다. 악하다는 결론을 확인하기 위해 행해졌던 확증 편향적 실험들의 실체를 철저하게 반박한다. ‘가상적 실험’을 반박했으면 남은 것은 ‘실제적 예시’다.
3부에서 이러한 ‘실례’를 재해석한다. 인간 본성이 선함에도 불구하고, 악한 행동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 고찰한다. 4부에서는 인간의 악을 통제하기 위해 행해졌던 권위들을 비판하고, 인간 존재를 믿어야한다고 호소한다. 5부에서는 인간의 악을 통제하는, 더 나은 방법을 논한다.
저자의 주장을 해체하고, 나의 언어로 묶으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호모 퍼피’이기 때문에 승리했다. 스스로를 길들여, 친화성과 사회적 지능을 높인 것이 동인이었다. 하지만 분명 악을 이야기하는 무수한 사례가 있다. 인간의 악을 탐구한 실험들이 떡하니 교과서에 찍혀있고,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역사가 실존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본질적 악을 ‘증명’한 실험들은 확증 오류와 편견으로 얼룩져있었다. 또한, 인간이 보여준 잔혹한 행동들은 상당 부분, 개인적 선을 추구한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믿음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악하다는 믿음이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작용하여 양의 되먹임 고리가 형성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고, 인간에 대한 선한 믿음을 가져야한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을 통제해야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계몽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선한 인식을 사회 전반에 퍼뜨려야한다. 사람들을 믿고, 권리를 주고 책임을 다하도록 민주주의를 개편해야한다. 배신당하더라도, 타인을 신뢰하며 비대칭적으로 행동해야한다. 악으로 보이는 다양성과 접촉하며, 인간이 선함을 다시금 확신해야한다.
PART 3 화살 쏘기
언뜻 보면 모두 진실 같다. 인간은 모두가 선하고 친절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시 보자. 정말 그렇까? 우리는 먼저 저자의 해석에 집중한다. 책에서 다룬 사례들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그 다음, 인간이 선하게 진화했지만, 현대에 들어와 오작동을 하고 있다는 작가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설령 정말 선하다고 하더라도, 작가의 이상향이 실현될 수 없는 이유를 논의해볼 것이다.
1.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 – 자기합리화 실험
이 책의 꽃은, 단연컨대 2부다. 전기충격 실험과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대목은 재밌다 못해 전율이 올라온다. 그 놈의 회의가 슬글슬금 고개를 내밀기 전까지는.
먼저 해당 실험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다른 실험이 있다. 그것은 바로,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 - 자기합리화 실험>이다. 실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정말 재미없는 실험을 시켰다. 의미없는 실험이 끝나고, 실험자들에게 한 가지 부탁했다. 다음 시간에 참여할 그룹에게 ”정말 재미있는 실험이에요“라고 거짓말을 해달라는 것이다. 거짓을 말한 대가로, 그룹 A에게는 20달러를 주었고, 그룹 B에게는 1달러를 주었다. 사실 이 ‘부탁’이 실험의 핵심이다. 얼마 동안의 시간을 두고, 그들에게 실험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다. 누가 실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까? 20달러를 받은 A그룹이 당연히 높은 점수를 줬을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결과는 반대다. 1달러를 받은 B그룹은 해당 실험을 무척이나 재밌고 유익했던 실험이라고 ‘기억했다’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레온 페스팅거는 실험을 이렇게 해석한다. 20달러를 받고, 거짓말을 한 팀은 돈 때문에 거짓을 말했다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 20달러는 거짓말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액수다. 하지만 1달러를 받고 거짓을 고한 그룹은 다르다. 고작 1달러 때문에 하는 거짓말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바로, 동기를 바꾸고 사건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다! 실제로 실험은 무척 재미있었다. 그렇기에 다음 팀에게 “재미있었다”라고 언질을 준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라고 말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이를 사실로 기억하는 습성을 타고났다.
전기충격 실험에서 저자는 3가지 근거로 인간본성을 옹호했다. 첫 번째는 그것들은 절반 가량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었다는 점, 두 번째는 강요에 의해 행해진 비자발적 행동이었다는 점, 세 번째는 과학적 발전이라는 선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레온 페스팅거의 이론을 이해했다면, 독자는 슬슬 예감이 올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모두 자기 합리화 이론으로 반박가능하다.
우선, 확실한 것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 그들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이 위험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볼트를 지속적으로 올렸다. 나는 이것을 ‘비대칭적 상황’이라고 칭하겠다. 실험 참가비와, 사람의 생명을 비교하는 저울은 상당히 기울어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비탄 받을만한 행위를 했다.
지금부터는 철저히 나의 추론이다. 참가자들은 실험이 끝난 뒤 돈을 받고, 집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욕조에 들어갔다. 머리를 적시며 내가 했다고 믿기지 않는 행위들을 떠올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그렇게까지 해야했던 확실한 이유를 자신에게 물었다. 확실히 돈 몇 푼은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제 욕조에서 나온 사람들은 문뜩 이유를 ‘발견했다’. 그들은 강요에 의해서, 과학의 발전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전압을 올린 것이다. 아니면, 사실 거짓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솔직히 나는, 다음 문장들에서 자기 방어의 전형을 보았다.
”나는 인류를 돕기 위한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랬다고 표현하고 싶다. 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봉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선을 낳을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실험을 계속하세요. 정서가 뒤틀려 있는 이 미친 세상에서는 아주 작은 선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어요“
우리는 인지부조화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거친 이들에 대한 설문을 얼마나 믿어야하는가? 물론, 그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확실한 사실로써 기억한다. 실제로 일을 그렇게 진행했다고 강렬하게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동기가 정말 그랬을까?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들이 행동한 동기는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알고 있다고 확실할 수 있는 것은, 결과뿐이다. 때문에, 두 실험의 결과가 잘못되었다는 저자의 해석에 그렇게 동감할 수 없다.
별개로 실험 내용과, 저자의 비판을 절충하여 나는 인간의 ‘성품’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본다.
첫 번째, 인간은 이득을 얻을 수 없다면, 굳이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는.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덕적 우월성과 같은 정신적 쾌락을 얻고자 도덕을 행할 수 있다.
두 번째, 인간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을 때, 꽤나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책임이 없다는 의미는 명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최고의 핑계가 있기에 고뇌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
세 번째, 인간은 선한 의도로 악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다. 또는 아무 생각 없이 행위를 하고, 그것을 충분히 합리화할 수 있는 존재다.
2. 선한 인간 본성, ‘악해진’ 인간 본성
저자는 ‘호모 퍼피’ 이론을 들어 선한 인간 본성을 주장했다. 또한, 노시보 효과와 개인적 선의 추구라는 2가지 근거를 ‘악해진 인간 본성’의 근거로 활용했다. 먼저 진화론과 선한 본성의 관계를 논하고, 악해진 인간 본성을 주장하는 브레흐만의 주장이 빈약함을 이야기 하겠다.
선한 인간 본성과 진화론
“투쟁과 경쟁이 생명체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협동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 생물학과 1학년이면 누구나 배우게 된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과연 그런가? 작가는 인간이 선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이론을 끌어온다. 서문에서 최재천 교수님이 지적했듯이, 그는 진화론적으로 선한 인간 본성이 왜 필요한지 납득할만한 주장을 하지 못했다.
인간이 성공한 이유는 사회적 지능 때문이다. 사회적 지능을 위해서는, 친화성이 필수적이다. 은여우와 보노보와 같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길들여, 착해진 것이 틀림없다. 친절함이 인간 성공의 정수라면, 하나 묻고 싶다. 다른 ‘친절한’ 종들은 왜 성공하지 못했나? 요점은 사회적 지능, 선함이 성공에 기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결코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선한 사례들을 무수히 끄집어냈지만, 인간이 선하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장은 하나의 장에 불과하다. 그의 주장의 가장 핵심인데도 말이다.
다시 한 번, 최재천 교수님의 아쉬움을 열어본다.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를 책에 곳곳에서 불러다가 때린다. 그는 과연 돌을 던지기 전에, 도킨스를 깊이 이해하려 시도했을까? 과학계가 왜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는지 고찰해보았을까? 매번 인신공격에 가까운 욕을 들을 것을 확신하면서도 말이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한 것은 확률이다. 구성원끼리 이타적인 집단에서는, 이기적인 유전자는 성공할 확률이 높다. 이기적인 유전자는 이기적인 개체를 선호할 확률이 높다. 잠깐, 여기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이타주의를 약속하고 행한다면, 선함이 진화적 성공을 보장한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서로 돕는 사회에서, 친절한 구성인 들은 분명 이득을 본다. 하지만, 개인적 이득을 추구하는 개체를 생각하자. 그 개체는 남들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을 본다. 이를 막을 수는 없다. 비율은 변동하겠지만, 이기성은 항상 실존할 것이다. 이것이 집단주의 유전학의 맹점이다.
악해진 인간본성
위 이야기의 골자는 그는 진화론을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유토피아의 변호사로써 원하는 과학적 ‘사실’들을 취사선택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한 또 다른 핵심 논리는 ‘인간의 본성이 악해졌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가 바로 노시보 효과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믿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만 이야기했다.
“인간이 믿음에 큰 영향을 받는 존재다.”라는 명제와 “실제로 인간이 악하다는 믿음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었다”라는 명제는 전혀 다른 명제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저자는 후자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3.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은 다르다.
좋다. 각 인간이 선하다는 저자의 주장을 인정해보자. 우리는 과연 ”손에 손을 잡고, 선을 넘을“ 수 있을까? 저자는 인간이 선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유토피아를 구축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이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라인홀드 니부어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피력한 것이다. 20세기 도덕주의자들은 개인 윤리 도덕만 잘 지키면, 세계가 평화로워질 것이라 믿었다. 기독교적 낙관주의에 차올라 세상이 마냥 희망차 보였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다. 니부어는 도덕적인 개인이 모여도, 결과적으로는 비도덕적인 집단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애국심이 대표적 예시다. 나라를 사랑하는 개인적인 비이기성이 모이면, 국가라는 집단의 이기성으로 전환되고 만다.
니부어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했다. 개인의 도덕성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허한 일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해답을 제시했다. 집단끼리의 ‘견제와 힘의 균형’이 집단의 이기성을 제한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브레흐만은 어떠한가? 개인의 도덕상만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처럼 주장한다. 그의 이론대로 인간이 선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집단은 다른 도덕이 적용되므로 우리는 그의 유토피아를 실현시킬 수 없다.
정리하자면, 우선 나는 저자의 주장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말했다. 그리고, 저자가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려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설령 그의 ‘주장’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 시도는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음을 얘기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적으로 통일된 의견을 내놓겠다는 마음과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글을 쓰면서 이 인터뷰 내용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 단 무게 추에 균형을 잃은 것이 아닐까?
PART 5 : 마무리를 하며
인간 본성에는 재밌는 점이 많다. 한 가지는 바로 관점의 이동이다. 장 자크 루소의 ‘고결한 야만인’ 토마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그리고 브레흐만의 ‘휴먼 카인드’까지. 사실들은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며 서로를 전복시킨다. 무엇이 사실일까? 아니 사실인 것이 중요하긴 할까? 미안하지만 중요하기는 하다. 중요하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모른다. 인간 본성에 대한 ‘사실’이 우리 사회에 정확히 어떤 함의를 갖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꿈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과 같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를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사회에 적용하고 싶다. 사실은 가치를 수정하라고 지시한다. 또 가치를 실현시킬 길을 깔아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긍정적이기만 할까? 아닐 것 같다는 불안감이 생기기도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책과 글을 읽어도 명쾌히 답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중요하기는 한데, 과연 해피엔딩일까. 스티픈 핑커의 ‘빈 서판’을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래 질문들을, 다른 책을 참고하고, 빈 서판에 대한 글을 쓰며 해결하고자 한다.
1. “과학은 진리의 후보일 뿐이다” / “과학은 사실이 아니라 주장이다” 이와 말을 어느 정도로 받아들여야하는가? 즉, 과학이 수정할 수 있는 삶의 범주는 어디로 한정되는가?
- 부주제: 과학철학에서 말하는 ‘과학’은 어떠한 의미며, 나는 과학자로써 과학을 어떻게 인식해야하는가?
2. ‘사실’은 ‘가치’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예시로, 과학(사실의 증명)이 법(가치의 실현)에 영향을 준 사례가 있다(청소년의 전전두엽 발달 지연은 청소년 범죄 처벌 강도 낮춰야한다는 근거로 활용됐다.
- 부주제: 인권이 가지는 ‘믿음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 멋진 신세계처럼 인간의 모든 특성이 대부분 결정되어있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사회는 이때도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을까?
- 소주제: 그 결과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과학은 놀이적 측면을 제외하고 의미가 있을까?
3. PC(정치적 올바름)에 일치하지 않는 과학적 ‘팩트’에 대해서
(1) 앎의 확장을 제외하고도, 긍정적 의의가 존재하는가?
- 그 결과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과학은 놀이적 측면을 제외하고 의미가 있을까?
(2) 해당 연구자를 범죄자로 몰아가는 사회 풍토는 왜 생겨났으며, 개인적으로 이를 어떻게 판단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