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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 안 해본 엄마라서 미안해

아이브와 이즈나를 넘어 이번에는 엔하이픈 인건가

by 퍼플레이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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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브도 겨우 외웠는데 이제 엔하이픈 이라니

요즘 초등학교 4학년인 큰 아이가 제일 관심 있고 좋아하는 건 '엔하이픈'이다. 딸은 아이돌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다가 사촌동생네에서 처음 아이브를 본 순간 예쁜 언니들의 엄청난 무대에 홀딱 빠져들어 아이돌 세계에 첫 발을 들였다. 나도 그때 옆에서 얼떨결에 아이브 노래를 열심히 들으며 아이브 멤버들의 이름과 얼굴을 익혔다. 우리집은 주말마다 시간을 정해서 유튜브 키즈를 보게 해 주는데 우연히 알고리즘에 뜬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서 첫째의 이즈나, 엔하이픈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 전 아이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옆에서 뭔가 쓰윽 봤더니 엔하이픈 멤버들이 예능 형식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을 재밌게 보던 중이었다. 아무 정보 없는 내가 보기엔 그냥 다 예쁘장하게 생긴 비슷한 청년들이었다.


"엄마 솔직히 이 중에서 누가 제일 잘 생긴 것 같아??" 하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질문하는 딸 모습을 보니 킥 하고 웃음이 났다. 아이브는 이제 좀 눈에 익을만하고 이즈나 노래도 꽤 들었는데 이제 엔하이픈 차례구나.



# 아, 너 잡팬이네

나의 학창 시절 H.O.T., 젝스키스, 핑클의 멤버를 알고 있는지 길거리 인터뷰하면 그 시대 어른들은 당연히 멤버가 누군지도 몇 명 인지도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 어른들을 보며 헛웃음을 치면서 아니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는지 진짜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른의 모습이 지금의 나였다.


애 셋 엄마가 된 나에겐 모든 아이돌 팀의 이름도 생소할뿐더러 당연히 몇 명인지 누가 누군지 알리 없었다. 물론 모든 어른이 나 같은 건 아니다. 내 친구 중에서는 아직도 뮤뱅과 음캠을 챙겨서 즐겨보고 누가 신곡이 나왔네 컨셉이 어떠네 하며 최신 소식에 빠릿빠릿한 어른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예매해 손꼽아 기다리다가 당일치기로 상경해 다녀오는 성실한 덕질을 즐기는 친구도 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난 덕질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생각해 보면 딱히 특정 그룹, 특정 멤버를 열렬히 좋아하고 그런 기억이 별로 없다. 굳이 그렇게까지 내 에너지와 관심과 사랑을 쫓을 필요성이 없고 내가 그런다고 해서 그들이 알리도 없다는 식의 시니컬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냥 내가 듣고 싶은 다양한 노래를 모아 아이리버 MP3에 넣고 다니며 들었다. 애들이 넌 누굴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딱히 없다고 답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아 너 잡팬이구나'였다. 맞지만 묘하게 거슬렸다.


특정 누구의 팬이라기보다 그냥 열심히 멋진 음악들을 선보이려 노력해 준 모든 가수들을 응원하는 편이라는 건데 꼭 그걸 잡팬이라고 비하하듯 말해야만 속이 시원했냐. 꼭 하나만 좋아해야 취향인가, 그냥 다 좋은 것도 내 취향인 건데.



# 솔직히 덕질을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잡팬 출신 엄마에게서 덕질의 조짐이 보이는 딸이라니 재밌지 않은가. 자기도 엔하이픈 콘서트도 가보고 싶고 팬사인회도 가보고 싶단다. 앨범도 사보고 정식 포토카드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효율을 추구하는 나에게 아이의 덕질 희망사항 항목들은 사실 몹시 쓸모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럴 시간에 숙제나 해라, 그걸 꼭 돈 주고 사야 되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이 아깝다 등등의 말들이 훅훅 올라온다.


아이의 덕질을 완전히 공감하긴 어렵지만, 지금 이 나이대의 아이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와 성장이 신기하고 반갑다. 어떤 대상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며 호기심과 열정을 쏟아보는 그런 것들이 사춘기 소녀의 정상적인 발달상황이 아닐까. 엔하이픈 오빠들을 보며 반짝이던 눈동자가 어찌나 빛나고 예쁘던지.


지난 육아 과정 속에서 뽀로로, 콩순이, 엘사, 시크릿쥬쥬, 티니핑을 넘어 이젠 어엿하게 아이돌 세계에 입문한 아이의 덕질 수준이 전보다 확연하게 성장해왔음을 새삼 느낀다.


때론 나도 덕질 좀 할 줄 아는, 소싯적에 덕질 좀 해봤던 엄마라서 아이의 덕질을 더 열심히 응원하고 노하우와 꿀팁도 알려줄 수 있다면 좋았겠다 싶다. 엄마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덕질의 역사를 촤르륵 펼쳐서 신나게 썰을 풀어주는 엄마여도 재밌지 않을까. 같이 콘서트도 가고 굿즈도 사모으고 포카도 정리하면서 알콩달콩 덕질을 즐기는 모녀 관계 말이다.


그치만 잡팬이었던 엄마는 해줄 수 없는 분야다. 생각해보니 딸의 덕질도 아이브에서 이즈나, 그리고 엔하이픈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잡팬과 덕질의 어느 중간쯤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치만 확실히 나와는 다르다. 덕질은 여전히 나에게는 낯선 세계지만, 아이 덕분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몰입한다는 게 얼마나 반짝이는 일인지 배운다.


딸, 덕질 안 해본 엄마라서 미안해. 그래도 너의 소소하고 귀여운 릴레이 덕질은 꾸준히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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