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생명과 책임'이라는 주제로 '이화에크리'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명절에 할머니집에 가면 상에 올라오는 반찬의 대부분이 해산물이다. 할머니집이 새만금에서 차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덕분이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집에 갈 때마다 우리가족은 차를 타고 변산반도 해변과 곰소 염전, 새만금을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빠는 어렸을 때 해변에서 놀다가 조개를 보면 손에 쥐고서 걸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집에서는 바다로 걸어갈 수 없다. 집이 옮겨진 것이 아니라 바다가 옮겨진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갔던 아빠의 고향이건만 나는 아빠가 놀았던 그곳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 어렸을 때는 보지 않았을까 싶어 머릿속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도통 기억이 안지 않는다. 내게 집 앞 바닷가는 오래 전부터 공사장이었고,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물이 마르길 기다리는 썩은 물이었으며, 지금은 갈대가 무성한 풀밭이다.
내가 아빠 고향의 흔적만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의 고향 또한,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나의 고향 여주는 남한강이 흐르는 곳으로 철새들이 강가에서 쉬었다가 가는 곳이다. 어릴적 철마다 '생태학교'를 다니며 강가 억새밭에서 쉬는 멸종위기종들을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하지만 15여년 전 사대강 사업으로 인해 보를 건설하면서 구불구불하던 강이 일자가 었고, 사람키보다 높던 억새밭은 물 밑에 잠겨버렸다. 어릴적 많이 보았던, V자 모양으로 나는 새들은 이제 오지 않는다. 내 고향에 남은 것은,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서 나는 썩은내와 그 물에 알을 깐 날벌레, 가끔 보이는 새들의 깃털뿐이다. 아빠의 고향과 마찬가지로, 강이 옮겨진 것이다.
'자연이 옮겨졌다' 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들리는가? 자연은 글자 그대로 '자연'스럽기에 자연인 것. '자연이 옮겨졌다' 라는 표현은 앞단어와 뒷단어의 모순을 자아낸다. 하지만 아빠의 고향이자 '수라'에도 나온 갯벌과 나의 고향 남한강, 그리고 그곳에 살던 '생명'들은 옮겨졌다.
인간을 제외하고.
갯벌은 달과 지구 사이의 인력에 의해 생기는 조차 때문에 생긴다. 365일 하루에 2번 바닷물이 갯벌로 들어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남한강은 동고서저의 지형을 따르는 한반도에서,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쪽에 위치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의 상류강이다. 구불구불하며 좁은 강폭과 빠른 유속이 '자연'스러운 남한강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갯벌과 남한강 근처에 거주하는 동물은 동물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어우러지기도 하고 때로 각자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 생태이며 자연이다. 자연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저절로 생겨난 환경과 생명'을 뜻한다. 하지만 갯벌과 바다, 강, 그 안의 생명들이 모두 인위적으로 옮겨지고 오직 인간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 자연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상기함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지구의 수많은 생물 중 먹이사슬의 정점에는 영장류가 있고, 그 중에서도 인간이 있다. 인간은 결국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저절로 생겨난 생명' 중 하나이고 먹이사슬의 일부를 차지한다. 즉, 인간은 자연 그 자체 혹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며, 생태계 먹이사슬 속에서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살아갈 때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오랜시간 최상위 포식자로 살아와서인지,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하는듯하다. 수만년간 지구의 지배종으로 살아온 인간이 다른 생명과 환경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테지만 여기에 조건을 하나 붙여야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것이 '자연스러움' 안에서 행해질 때 당위성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 조건에서 벗어난다면 더 이상 이용이라 불릴 수 없고 파괴라 명명해야한다. 자연스러움을 파괴하는 것은 곧 우리를 파괴하는 것. 이 사실을 망각한채 옮겨진 강과 바다, 새들의 흔적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바다가 365일 같은 자리에 있고, 그 바닷물이 매일 두 번씩 갯벌을 적실 때. 강이 그저 흘러가고 새가 그저 살던 곳에서 살아갈 때, 그리고 인간이 지구의 지배종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질 때.
그때가 바로 ‘자연’스러움이
비로소 존재하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