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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선물했습니다.

가장 작은 마트로시카

by 유랏차차

2025. 10. 23. ~ 2025. 10. 27. 전남 광양에서 열린 남도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남도영화제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남도 영화 연기 워크숍의 배우로 참여하며 장건재 감독님이 계신 영화사 모쿠슈라와 함께 <배우의 시간>이라는 영화를 찍었습니다. 저에게는 엄청난 시간이었기에 이 경험은 별도의 포스팅으로 올리겠습니다. 워크숍에서는 저희에게 각자의 연기 파트너를 알아가는 여러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그 마지막 과제는, 나의 파트너에게 시를 써서 낭독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연기 파트너는 저의 거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건, 워크숍 시작 전에 나눈 익명의 자기소개에서부터 느껴졌습니다. 모쿠슈라에서는 워크숍에 오기 전에 8명의 참여 배우들에게 "내가 말할 수 있는 비밀"을 적은 익명의 자기소개서를 먼저 써서 공유하고, 그걸 보고서 각자 원하는 연기파트너를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후크선장'의 자기 바다를 찾는 항해기를, 제 연기파트너는 '꿈쟁이'의 꿈을 찾는 여정을 썼습니다. 읽자마자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제1지망으로 선택했고, 꿈쟁이는 저의 최종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모르는 서로가, 주변 사람에게도 잘 말한 적 없는 깊은 비밀을 만나기 전에 이미 공유해서인지 만나자 빠르게 가까워졌습니다. 저도 제 파트너인 '꿈쟁이'와의 촬영을 앞두고 단기간에 서로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꿈쟁이는 본인의 여린 기질과 본성을 주변의 기대에 맞추며 열심히 부정하며 살아오다가 어떤 계기로 와장창 깨진 후에 뒤늦게 나다운 삶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그 삶의 궤적이 저와 참 비슷했습니다. 둘 다 긴 시간 동안 행복해지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습니다. 그 끝에 얻은 깨달음도 같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사람의 인생을 보면서 "잘 컸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 저한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좌충우돌 우당탕탕 워크숍에서 최종 과제로 '꿈쟁이'에게 시를 쓰게 될 즈음에는 그 삶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습니다. 반나절 밖에 시간이 없었지만 계속 꿈쟁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래의 시가 나왔습니다.




가장 작은 마트로시카


겨울 내내 주인 없는 마트로시카를 봤습니다


이음새가 헐거워져

들자마자 후루룩 쏟아져 나오는,

군화 신은 큰 마트로시카 안에

붓을 든 중간 마트로시카 안에

태권도복 입은 작은 마트로시카 안에

더 이상 열리지 않는

그것은

작디작은 하얀 공 하나


그것은

제 발로 굴러

아스팔트 틈에 자리 잡고는

도저히 주워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 자리에 이파리가 돋아났습니다.


그것은

마트로시카를 깨고

제 토양을 찾아

온몸으로 뿌리내린

그 작디작은 하얀 공

그 꿈틀대는 생명





시를 주고받는다는 건 참 따뜻한 일이었습니다. 8명의 배우들은, 서로의 짝꿍과 시를 주고받는 낭독 자리에서 다들 눈물을 흘렸습니다. 강인한 저는 눈시울만 조금 붉어졌지만요 후후. 누군가 나를 생각한 시를 받는 일이 참 고마웠고, 또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시를 써준다는 것은 정말 뿌듯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시를 써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워크숍에 가져간 수첩에 시를 써서 읽었습니다.


아직도 워크숍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전 광양에서 멋진 사람들을 만났고, 주변을,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작년 프랑스만큼이나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광양 자연 휴양림이 눈앞에 아른거리네요. 너무 멋지지 않나요?

숙소에서 보이는 풍경, 이 운동장 옆에서 제 장면을 촬영해서인지 마음이 더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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