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백수 손님의 플리마켓 오픈기

사당 비건 카페 휘게라이프에서 손님인 제가 플리마켓을 열었습니다.

by 소호 림

가만히 있으면 병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1월, 평일 낮 반팔에 롱패딩 입고 모자 쓴 채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아이스크림 할인점 인형 뽑기 앞에 서서 3천 원을 태워 먹는 나는 백수였다. 퇴사한 지 3개월이 막 지난, 아직 마른오징어 같던 내게 활력을 넣어준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휘게장터. 지난 1월 18일 토요일, 사당 비건 카페 ‘휘게라이프에’서 열린 플리마켓이다.

두둥! 자랑스러우니 크게 보자!

그렇다. 내가 바로 휘게장터 기획자다. 백수 생활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판을 또 벌였다. 4시간 동안 진행된 장터에는 스무 명의 셀러가 모였고, 약 119명이 다녀갔다. 휘게장터에서 나온 수익금 일부는 근처 보육원 교육 프로그램비로 쓰이도록 기부했다. 평범한 사당 주민이자 카페 단골이 또 다른 단골, 사장님과 합심해서 만든 이벤트 ‘휘게장터’. 그 이야기는 집 크기에 비해 많은 짐을 감당하지 못한 맥시멀리스트(나)의 흑심에서 시작됐다.


@bebe_the_ori

<휘게라이프 정보>

휘게라이프 인스타그램



사장님 저 플리마켓 해보고 싶어요

사당 비건 카페 휘게라이프와 나의 관계를 설명해 보자면, 나는 이곳 한 달 전기세를 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왕 단골이다. 집 근처 비건 카페를 찾다 발견한 뒤로 지금까지 주 1회는 무조건 출석 도장을 찍고 있다. 덕분에 작년으로 방문 기록 100회를 넘겼다.

작년 여름 87회였다.


언젠가 휘게라이프에서 만다라트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쿠팡에서 만다라트 한 묶음을 샀는데 25장이었다. 나는 한 장만 있으면 되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일 년 다짐을 해봐도 재밌겠다 싶어서 휘게라이프 사장님께 손님들과 원데이 모임을 하고 싶다고, 모집에 도움을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원래 나를 잘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과 나눌 때 더 편하게 말이 나오는 주제가 있는 법) 영업시간에 커피 강매를 시키려던 나의 발칙한 전략을 사양한 채, 휘게 사장님은 휴무 날 무려 2시간이나 공간을 대여해 주셨고, 그날 이후로 휘게 사장님과 작당 모의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다.


손님이 많지 않던 날 사장님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플리마켓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집에 짐이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인데, 그런 사람들 모아서 플리마켓 열고 싶다고. 사실 영업시간을 빼거나, 휴무 날을 빼앗아야 하는 것이라 입 밖으로 한번 꺼낸 뒤 다시 언급하진 않았는데. 어느 날 휘게 사장님이

“언정님, 플리마켓 해야 해요. 하세요. 독서 모임 사람들에게 플리마켓 준비 중이라고 소문냈어요!”

(휘게 라이프에서는 매주 월요일 독서모임이 열린다.)

추진력을 불어넣어 주셨다.


@bebe_the_ori



3인방, 3주 플리마켓 오픈 대작전

혼자 일 벌이는 것이 익숙한 내게 휘게 사장님이 필요한 사람이 있냐, 누군가를 붙여주겠다 했을 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버버 하고 있으니, 우연히 휘게라이프에서 자리를 공유한 이후로(사람이 많아서 4인석을 셰어 했다.) 독서 모임도, 글쓰기 모임도 종종 같이 하던 다른 단골 소희님이 휘게장터 준비단으로 투입되었다.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소희님이 채워주었거든.


회사에서 킥오프 미팅부터 수많은 미팅을 하며 프로젝트를 해나가던 직장인이었기에 우선 만나자고 했다. 12월 휘게라이프 구석탱이 4인석에서 휘준단 첫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간결하고 신속하게! 자료 준비는 미리미리!’ 회의 시간 줄이기 운동까지 있던 구) 직장 덕분에 나는 정해야 할 것, 큰 그림 등을 세세하게 준비해 갔다. 하지만 회의하면서 부질없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킥오프 회의에서는 그 단계에서 우선 해야 할 것들만이 존재했다. 디테일은 그다음이었다.

당장 정해야 할 것을 이야기했다.

1. 일시
2. 왜 휘게라이프 카페는 플리마켓을 여는가? 우리 플리마켓만의 차별성은?
3. 수익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4. 셀러 모집은 언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5. 카페 메뉴 판매는 할 것인가?
6. 플리마켓의 이름은?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2번 why였다. 명함에 브랜드 기획자라는 이름을 달고 일을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정체성이 가장 중요했다. 휘게라이프의 슬로건은 편안하고 다정한 카페다. 이곳은 지구와 그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 비건 디저트를 굽고 커피를 내린다. 화장실에는 핸드 티슈 대신 매일 빤 손수건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어느 카페에나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도록 한쪽에 두는 냅킨을, 이곳에선 메뉴 서빙 시 사장님이 인당 한 장씩만 내어준다. (물론 더 달라고 요청하면 주신다.)


휘게라이프 카페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한 이유에 우리가 어떤 플리마켓을 만들고 싶었는지가 담겨있다. 휘게 정신을 잔뜩 녹인 플리마켓, 아나바다 장터. 우리 장터의 키워드를 ‘새활용’으로 정했다.

컨셉을 정하니 어떤 물건을 들여놔야 할지, 어떤 셀러를 모집할지 기준이 생겼다.

1. 상업적 행사는 아니니,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사업자는 안됨!
2. 단, B급 상품은 가능 (판매가 어려운 상품은 쓰레기가 될지도 모르니깐)
3. 직접 만든 것, 쓰지 않는 새 물품 또는 중고 물품 웰컴


1월 18일 토요일 사장님께서 영업시간 일부를 빼 주셨다. 사장님이 플리마켓을 여는 목적은 카페를 사랑하는 손님들에게 새로운 이벤트(경험)를 선물하고 싶어서, 보답하고 싶어서. 그래서 셀러 참가비를 받자는 나의 제안도 사장님은 쿨하게 거절하셨다. 사장님은 알아서 매출 방어를 해본다고 하셨다. 그래도 내 마음에는 부채감이 자리 잡았다.

나는 수익금을 기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셀러의 수익금 일부 기부를 참여 조건으로 해 모집하자고 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반대하셨다. 셀러들도 열이면 열 카페 단골일 텐데, 그분들에게 짐을 주긴 싫다고. 사장님의 지독한 손님 사랑이었다.

12월, 포스터와 홍보물을 준비하고 1월부터 본격 셀러를 모집하기로 했다. 우리 장터 이름은 소희님이 떠올린 ‘휘게장터’. 화개장터가 생각나면서도 직관적이고 마음에 들었다. 본디 이름은 직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입에 쫙쫙 달라붙지.

킥오프 회의록



디자이너 없이 포스터 만들기

기획자이지만 제일 중요한 건 결국 디자인이라 생각한다. 백날 천날 떠들어봤자 소용없다. 한 번의 시각적인 각인이 충격을 만든다. 포스터 디자인 재능 기부자를 찾으려고 마음으로 노력했으나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12월은 1년 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어서 겨울잠을 들어야 할 달이기도 했고, 이전 디자이너 친구와 한 번 작업한 적 있었던 나는 지인에게 무일푼 디자인을 맡긴다는 것은 내가 슈퍼 을이 된다는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핀터레스트에 레퍼런스를 잔뜩 쌓아두기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소희님이 나섰다.


소희님이 포스터의 첫 스타트를 끊었다. 로고를 만들어준 것. 소희님의 씨앗이 내 생각의 물을 받아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포토샵을 켜 소희님이 제안한 디자인을 오리고 붙여 포스터를 만들었다.

나는 대단한 기술이 없다. 그래서 깔끔해야 했다. 선과 면으로만 구상한 포스터. 쓸데없는 효과나 기술이 없는 간결한, 그러나 부족해서가 아니고 의도인 것처럼 보이는 포스터. 그런 포스터를 지향하며 밤새 만들었다. 겨울잠 대신 선택한 포스터 디자인에 굳어 있던 마음이 깨어났다.

인스타그램 티징용 이미지


장바구니 안에 담긴 휘게장터. 휘게장터 글자 하나하나는 지구 색상을 써 장터가 추구하는 바를 나타내고자 했다. 노이즈를 줌으로써 오래된, 화개장터 느낌도 가미했다. 내가 그동안 회사에서 수도 없이 훈련한 카피 쓰기. 이럴 때 써먹는 거지! 방문객을 부르는 말투, 휘게 사장님이 생각나는 어투로 휘게장터를 소개하는 포스터 카피를 썼다.


휘게장터 10일 전, A3로 주문한 포스터가 도착했고, 사장님은 카페 입구 유리문에 리터럴리 대문짝만 하게 포스터를 붙였다. 붙어두어도 그냥 넘긴 채 들어오는 손님이 많아, 사장님은 10일 동안 ‘휘게장터를 엽니다’ 장터무새로 주문하는 손님들에게 말을 건넸다.



셀러와 물건 준비

구글 스프레드시트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만들기

셀러 모집 구글 폼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장님은 냅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포스터 사진을 올리고 셀러 모집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생각보다 이 방식, 나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일을 어렵게 하려고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하면서 나는 ‘하자’, 사장님은 ‘하지 말자’ 했던 것들이 3개 정도 있었는데, ① 구글 폼 ⓶ 구글 스프레드시트 활용 ③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사용이었다. ‘하자’, ‘하지 말자’의 목적은 같았다. 일을 편하게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지만 시작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우리는 모집을 시작하면서, ‘아 그게 좋겠구나!’ 서로의 의견에 맞장구쳤다. 물건을 5개 내놓는 사람, 10개 이상 내놓는 사람. 정말 다양했다. 물건만 낼 수 있는 사람과 물건을 직접 판매할 수 있는 사람까지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단 한 개라도 물품을 장터에 내놓는 셀러가 약 30명이 되었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공지하고 조율하기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이 최선이었다.

밑미 기지개 클럽 리추얼 치어리더(운영진)를 할 때,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을 썼다. 그때, 오픈 채팅방 세팅 방법을 익혔다. 포스터를 채팅방 사진으로 설정하고, 입장 시 안내되는 자동 문구를 등록했다.

글자수 제한 맞춘다고 애썼다. 후후.
이런 공지를 했다.


얼마나 많은 물건이 휘게장터로 모일지, 각 셀러에게 얼마만큼의 공간을 주어야 할지 미리 파악이 필요했다. 그래서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팠다. 대략 판매할 물건과 시세를 만들기 위한 판매 예상 금액, 직접 판매할 것인지 누군가 위탁 판매할 것인지(판매 물품 수가 적고, 당일 상주하기 어렵다면 휘준단이 위탁해 판매하기로 했다.) 기입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구글 스프레드시트


이 작업을 하면서 배운 것이 있는데, 뭐든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적어야 한다는 것!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익숙하다. Gmail도 활발하게 쓰고 문서작업은 마이크로보다는 구글이다. 그래서 당연히 구글 스프레드시트 작성을 위해서는 로그인이 필요하고, 휴대폰으로는 앱을 쓸 수 있으며 pc에선 그냥 적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으로 생각했다. 사장님이 오픈채팅방 자동 안내 문구에 추가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셀러 중에 구글 도구를 사용한 적이 없는,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구나! 생각의 벽이 또 하나 깨졌다. 시트를 쓰니 어떤 품목에서 셀러가 부족한지, 어떤 카테고리 셀러가 많은지 직관적으로 파악이 가능했다. 그래서 중간중간 부족한 품목 셀러를 섭외하기도 하고, 풍족한 셀러는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거절할 수 있었다. 즉,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방문객 이벤트

셀러가 모이고, 구글 스프레드시트가 채워지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 플리마켓이 더 즐거울 수 있을까? 이벤트를 구상했다. 이왕 하는 플리마켓, 언정님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는 사장님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이벤트에는 3가지가 필요하다. 목적, 상품, 방법.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나의 아픈 구석인 카페 매출 방어에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준비한 것은 2가지였다. 카페 메뉴를 구매할 경우 참여할 수 있는 경품 이벤트와 휘게라이프 카페 100번 넘게 온 단골이 추천하는 메뉴판 만들기. 이 두 가지가 얼마나 매출에 영향을 줄진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을 했다. (하지만 매출은 사장님이 저 살길을 구해 메꾸셨다는..)


휘게장터 동안 카페는 모두 테이크아웃으로 운영되었는데, 장터를 둘러보고 메뉴를 주문할 경우 뽑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한 번을 주었다. 뽑기 상품은 휘준단이 판매하려고 했던 새 상품 몇 가지와 사장님이 기부한 카페 커피 쿠폰 3장. 그렇게 13명이 행운의 기회를 가져갈 수 있었다. 꽝과 1부터 13까지의 번호를 적어 왕 주머니에 넣고 상품에 1부터 13까지의 번호를 매겼다. 달력, 티코스터 등 나는 필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선물이 될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뽑기 이벤트 전단지


휘게라이프 100번 넘게 온 단골 추천 메뉴는 매출 방어의 목적도 있었지만, 그냥 내가 하고 싶었다. 휘게라이프를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휘게에 대한 사랑을 휘게장터 오는 사람들에게 선언하고 싶기도 했고, 좋은 거 있으면 방방 알리는 성격이라 많은 사람에게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를 추천하고 싶었다. 이 메뉴판을 카페 벽면 곳곳에 붙였다. 의외로 웨이팅이 있었던 덕분에 사람들에게 기다리면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통밀 빼빼로는 지금 스마일 쿠키로 변경되었는데 더 존맛탱이다.



D-1

디데이가 다가오고 휘게라이프는 나의 작업실이 되었다. 장터 하루 전, 나는 카페에 오후 3시에 들어가 밤 10시 넘어 나왔다. 거의 하루 근로를 한 셈이다.


포스터 작업할 때 만들어둔 D-1 안내 공지를 띄웠다. 인스타그램 홍보 전략은 ① 휘게장터 소식 알리기(포스터 업로드) ② 휘게장터 상세 안내하기(카드뉴스)였다. 휘게장터 더 잘 즐기는 법과 장터 물건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하이라이트에서 확인하라는 정보를 담았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하이라이트는 무엇이냐. 내가 손님이라면, 어떤 지점에서 휘게장터에서 오고 싶을까 생각을 해보니, 내가 살만한 상품이 저렴한 가격으로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보여줘야 한다 상품을. 하지만 위탁 말고는 제품 사진을 직접 찍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셀러가 직접 상품 사진을 스토리에 올릴 수 있도록 인스타 스토리 템플릿을 만들어 오픈채팅방에 뿌렸다.

내가 솔선수범했다. 내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템플릿을 활용해 상품 사진을 올리고, 휘게장터 인스타그램으로 들어가 나의 스토리를 리그램 했다. 셀러 대부분이 휘게 단골이라 인스타그램 팔로워였다. ‘아, 채팅방의 그 템플릿이 이렇게 쓰일 수 있구나!’ 내 스토리가 그들을 학습시킨 것인지 하나둘 스토리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하이라이트는 금방 쌓여갔다. 덕분에 장터 손님들은 방문 전 미리 원하는 물건을 볼 수 있었다.

회심의 전략


위탁 판매 물품은 하루 전에만 휘게라이프에 맡길 수 있다고 공지했기 때문에, 그날 물건이 모였다. 나와 소희님은 몰려드는 물품을 스프레드시트에 모두 옮겨 적었다. 당시에는 조금 힘들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당일 아비규환 상태였을 것이다. 위탁 물건을 정리하고 그다음으론 내 물건을 정리했다. 나는 어차피 목적이 ‘수익’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처분이었다.) 다이소를 표방하여 5,000원 아래로 가격을 책정했다. 그래서 부스 이름도 다잇소. 하루 종일 다잇소 간판을 그리고 칠하며 만들었다.

다이소 아니죠 다잇소 입니다 ~
노동의 현장


처음엔 조촐하게 나만 셀러인 플리마켓을 생각했는데, 갑자기 판이 커지다니! 차린 것이 많아졌다. 차린 것은 많은데 찾아오는 손님은 파리 새끼 한 마리도 안 될까 봐 조바심이 났다. 상을 채워준 요리사들에게 미안하니깐, 뭐라도 해야지, 어떻게라도 홍보해야지 싶었다. 잠잠했던 내가 속한 단톡방들을 홍보 카톡으로 깨우기도 하고(얼굴에 철판 깔았다.), 당근에 가격을 나눔으로 하고 홍보 글을 올리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했다.


사람이 얼마나 올까 궁금했다. 직장인병 중 하나는 모든 일을 수치화하고 정량적 성과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카운팅만 하고 있을 사람도, 개수기도 없었다. 방명록을 둘까? 고민하다 직접 ‘나왔소~’ 알리는 체크판을 만들기로 했다. 어쩌면 이 줄 하나 긋는 것부터가 휘게장터를 체험하는 즐거운 순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 체크판 옆, 볼펜을 달았다.

입장식 오타다. 입장 시, ㅎ
그리고 이렇게 정말로 입장할 때 다들 우물 정자를 써주셨다.


마지막으로 자리 배치를 하고 휘게라이프 문을 닫았다. 달라진 구조에 어색해진 공기가 가슴을 두드렸다.

소희님이 그려준 자리 배치도



휘게장터 정상 영업 합니다

휘게장터는 12시부터 시작했다. 셀러들에게 10시부터 와서 세팅해 줄 것을 알렸다. 셀러 모집을 너무 잘한 바람에 카페 내부가 상상 이상으로 붐빌 것 같았다. 어쩌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일찍 와 달라고 당부했는데, 참 잘한 선택이었다. 미리 자리 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자리가 없다는 셀러들이 속속 등장했다. 자리 사이사이 틈을 만들었다. 테트리스 퍼즐 맞추는 것 마냥 서로 자리를 내어주고 붙어주고 해 작지만, 옹골찬 장터를 만들었다.


1시까지 세팅을 마치고 잠시 집을 다녀왔다. 시간 맞춰 카페에 방문했는데 이럴 수가. 2층인 휘게라이프 계단을 타고 내려와 1층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홍보가 잘 되었단 말인가. 휘게 라이프 카페의 힘인가, 내가 홍보를 잘한 것일까.


나의 자리는 입구 바로 앞이었다. 방문자를 맞이하고, 나가는 길 뽑기 이벤트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입구에 삼삼오오 모은 종이 가방도 있었는데, 물건이 많은 분께 안내도 필요했다. 12시가 되면 오픈할 예정이라 기다리는 손님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어디서 오셨어요?” “뭐가 제일 기대되시나요?”


12시 땡, 입장 시작. 우려대로 정체 이슈가 있었다. 작은 공간에 꽉꽉 채워 넣은 장터 물건이라 옹기종기 구경하는 탓에 인구 이동이 더뎠다. 적당히 입장을 끊고 스몰토크를 나누며 내부 밀도 조절을 했다. 입구에 붙여둔 단골 추천 메뉴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이 단골이 저예요. 커피 한잔 사서 가세요~” 입장을 기다리는 손님이 “맞아, 여기 초크 케이크 존맛탱.”이라고 했을 땐 내 카페도 아닌데 괜히 뿌듯했다.

북적북적 휘게장터


“이 모자 있나요?”

신기하게도 전날 올린 판매 물품 스토리를 보고 장터를 찾은 사람이 꽤 있었다. 심지어 팔릴까 싶었던 패딩은 무려 4명이나 찾았다.


반드시 팔릴 것으로 생각한 물건은 인기가 없었고, 이걸 누가 사갈까 하는 것은 오히려 빠르게 팔렸다. 예를 들면, 안경테라던가 다이소에서 사고 쓰지 못한 공병이라던가. 몇백 원, 몇천 원 하는 가격이 한몫했으리라.

내 자리
접니다.


호객 중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마감 시간인 오후 4시가 다 되어갈 무렵, 절반 이상을 판 셀러도 있었고 아직 갈 길이 먼 셀러도 있었다. 제일 구석에 자리한 셀러의 제품 일부를 받아 입구 내 자리에서 대리 판매를 했다. 그저 위치만 옮겼을 뿐인데, 팔렸다. 구석 자리를 배정해 준 셀러님께 죄송해 더욱 열심히 제품을 설명하고 호객했다.

오후 4시. 처음의 절반이 되는 물건을 남긴 채 휘게장터는 마무리되었다. 꽤 만족스러운 장터였다. 축제 같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마시며,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았을걸. 다음에 비슷한 행사를 여기서 또 하게 된다면 참고해야겠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다 판매한 셀러는 없었다. 중간에 큰 가방을 두어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할 물건을 모았다. 어차피 많은 셀러에게 이 장터의 목적은 ‘수익금’이 아니었던지라, 서로 물건을 교환하기도 하고, 가져가지 않을 물건은 기부 가방에 넣으면서 장터를 정리했다.

생생 휘게장터 현장 ~



휘게장터 그 후

옷과 잡화 한 바구니가 나왔다. 열심히 들쳐 매고 걸어가 남성역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그 많던 옷과 잡화들이 다 합쳐서 5만 원이 조금 넘는다는 사실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_^


단골 부부의 위탁판매 수익금과 나의 수익금을 합해 카페 뒤 보육원에 기부하기로 했다. 미리 전화를 드려 방문 약속을 잡고 나와 사장님이 직접 갔다. 사실 동네에 보육원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기부금이 사용되는 항목을 직접 고를 수 있었는데 나와 휘사장님은 일심동체로 프로그램 활동비를 골랐다. 이 돈이 아이들이 경험하고 성장하고 배우는 데 쓰일 거로 생각하니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



장터가 내게 남긴 것

장터를 준비하면서 즐거움과 혼란이 동시에 찾아왔다. 즐거움은 당연히 다가올 현장의 설렘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척심 뭐, 그런 것이다.

혼란은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백수인 나는 회사를 나올 적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외쳐 회사가 붙잡을 실 한가닥도 남기지 않았다. 매체에 가겠노라, 에디터든 기자든 전문적인 글쟁이가 되어보겠노라 외치고 나왔는데, 정작 나와서 즐겁게 하고 있는 것은 모임 만들기, 이런 행사 열기. 오프라인 프로그램 기획이었다.


휘게라이프 카페는 내게 사랑방과 같다.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이 있다. 그중 조언을 많이 해주던 P님은 위탁 판매로 물건 몇 개를 내놓으셨다. 장터 전날, 물건을 맡기러 온 P님이 앞으로 이런 분야의 일을 할 것이냐 물었다. 그 물음은 내가 나에게 하고 있던 질문이었고, 답을 내리기 어려워 피하던 문제였다. 내 이야기를 P님께 쭉 털어놨다. P님은 ‘언정님, 그런데 포토샵도 다룰 줄 아시고 이런 기획도 하실 줄 아는데, 글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워요.’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까운 건 두 번째, 내가 답답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은 많은 데 그중 하나만 판다는 것이 안 맞을 수도 있겠구나.

장터가 끝나고, P님이 내게 DM을 주셨다. 내 강점은 무엇인지, 그래서 덕분에 즐거웠다는 내용이었다. 나야말로 덕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일을 구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나를 행동하게 한 P님의 감사한 피드백. 영원히 내 맘속 저장이다.


비슷한 시기, 장터에 방문한 친구 H도 ‘너는 기획자로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확신을 내게 주었다. 이때부터 생계유지를 위한 메인 job과 은은하게 가져갈 평생의 job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 나는 마케팅 기획팀에서 여러 이벤트를 기획하며 벌어 살고 있다.


언젠가 휘준단과 브런치를 먹으며 휘게장터를 회고했다. 그 자리에서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요?’ 이런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가 나왔다.

“저 다음에는 휘게 단골들을 인터뷰해서 휘게라이프 잡지를 만들고 싶어요.”

다시 직장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내 삶의 영역에서 계속 이벤트를 만들어가고 싶다.

휘준단 브런치!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방금 내가 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