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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Dec 20. 2022

나의 휴직 일기 1. 결심

배부른 소리 같을까 봐 미루기만 했다. 그러다 터졌다.


나의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타인의 기대가 있었고 시키지 않은 눈칫밥 먹으며 자랐다. 기대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나의 일, 행복이기도 했고 어떨 때는 모든 것의 이유도 됐다. 냉장고에 상장 붙이고 행복해하는 엄마의 기대를 위해 공부했다. 친구 사이에서는 늘 내가 맞춰 주는 쪽이 편한 듯했다. 착하다 하면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았고 재미있다 하면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장학금 타 올 때면 가계 형편 살 만해진다길래 무리해서라도 성적 장학금에 목매기도 했다.


회사도 엄마처럼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에 걸맞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기적으로 회사는 내가 인재상과 맞게 가고 있는지 복기해 주었다. 평가와 레벨링으로, 면담으로. 4년간 평가 기준표와 나를 대조했다. 채윤 님이 생각하는 자신의 레벨은 몇인가요. 4 초는 되지 않을까요. 아뇨. 높게 쳐서 겨우 3 후라고 봐요. 그런데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4 초를 주긴 할게요.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의 4가 무슨 의미일까. 기분 더러워. 노력했는데 알아주지 않는 기분. 위해 줬는데 모자라다고 들은 기분. 그게 나의 좌절스러웠던 1년 차였고. 꾸역꾸역 버텨서 2년 차. 피드백 수용 능력이 좋네요. 그래도 이런 부분은 아쉬워요. 레벨 4. 3년 차. 걱정은 안 되는데 발전은 없어요. 또 레벨 4. 4년 차. 다가오는 평가 시즌. 울렁거렸다. 높은 레벨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치 보이지. 내가 왜 자꾸 발전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어차피 이 회사는 나한테 바라는 게 계속 많을 텐데. 쉬고 싶어. 나는 이 이상을 바라는 사람도, 가능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해.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쉬고 싶어. 더 높이 안 가고 싶어.


속으론 반기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하는 척하는 날들의 연속이었고 습관처럼 눈치를 보았다. 나는 원래부터 눈치를 자주 보는 사람이니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심하게 의식하니까. 아무도 내 생각 한들 안 한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당장 내가 의식을 하니까. 의식하지 말아야지 생각한다고 의식이 안 되는 게 아니니까. 누가 봐도 일 잘하는 것 같은 사람들, 내 머릿속에서 정의한 '연차에 걸맞은 능력'을 잘 발휘하는 사람들이 모인 팀에 합류했다. 어떻게 보면 기회일 수 있다. 똑똑한 사람들에게 잘 배우고 그렇게 나를 옥죄던 "회사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 팀은 잘 굴러갔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뚝딱뚝딱 완성해 나갔다. 부품처럼 끼워 맞춰져 있으면서도 스스로에게 만족이 안 됐다. 비교되는 것 같았다.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치 보는 사람은 눈치가 빨라서 잠시간의 적막과 미묘한 차이만으로도 마음이 읽힌다. 프로젝트 진행도에 대한 우려를 표할 때. 공유하고 있는데도 자꾸 공유해 달라는 메시지가 달릴 때. 우리 회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주도성을 못 행하는 것 같을 때. 기대를 못 미치는 사람이 되는 기분. 거지 같았다. 왜 자꾸 나는. 나는 왜 계속 못하지. 못한다고 말 안 했는데 못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 잘하고 싶은 생각 안 드는 것도 지친다. 남이 어떤 생각 할지 그만 생각하고 싶다. 이 회사에만 있으면 나를 위한 것이 뭔지를 모르겠어. 무언가 깊은 곳에서부터 억눌리고 꽉 막힌 것 같은 마음. 터져 나오지 못하고 숨통 조이고 헐떡이는 기분.


그러다 아빠가 항암을 위해 입원했다. 이제는 방사선 치료가 불가능해 부작용이 심한 약물을 맞아야 하는데. 엄마가 아팠다. 자가 키트 해 봐, 엄마. 응. 엄마는 아프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어이가 없었다.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슬퍼 죽겠는 마음. 연차 낼 테니까 쉬어. 내가 보호자로 가면 돼.


책임.

기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몫.


엄마 확진 메시지와 함께 관자놀이 짚으며 메신저를 켰다. 출근은 해야지. 살아 내야지. 집에서 원하는 시간에 출근하는 게 어디야. 사람 때문에 고생하지도 않는데. 일하느라 몸 부서지지도 않는데. 난 복 받은 거야. 감사하며 살아야 돼. 힘들 것 없어. 켜자마자 본 메시지는 몇 주간 이끌어 오던 프로젝트에 대한 질문. 진행 상황 공유 부탁드려요. 공유 부탁. 진짜 그냥 공유 부탁한 메시지일 뿐인데.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렇게 언급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어. 내가 먼저 공유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해야 되는데. 주도성. 채윤 님은 주도성이 부족해요. 저 그거 어려워요. 그래도 해야 되는데. 해 보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오래도록 못해도 되나. 책임. 기대. 내가 해야 할 몫. 아무것도 만족하지 못한 기분. 이어지는 회의에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화면과 마이크를 끄고 베개에 얼굴 파묻고 울었다. 뭘 위해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어. 아빠도 아프고 엄마도 아파. 그리고 나도. 다들 오래 아팠어. 쉬고 싶어. 계속 쉬고 싶었어. 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입사했을 때부터. 입사했을 때부터 난 이미 쉬고 싶었을지도 몰라. 뭘 몰라 그게 맞아.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을 갖고 싶어. 더 바라는 것 없이 쉬고 싶어. 쉬고 싶어. 배부른 소리 아니야. 쉬고 싶은 거야.


나는 왜 중심에 내가 없는 것 같지.

누굴 그렇게 의식하고 누굴 그렇게 위해 주며 살려 하지.

나를 위해 살았던 때가 언제지.


눈물 참는 습관 때문에 잘 울지 못하는 게 때로는 서러웠는데 그럼에도 저항 없이 흐르는 눈물이 내 상태를 인지시키기도 했다. 결심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 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처음으로.

나를 위한 결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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