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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Oct 12. 2021

연극 <분장실>, 왜 다들 연극에 미치나

연극 <분장실>, 왜 다들 연극에 미치나     



“연극을 너무 많이 보셨군요, 볼로디아. 누구든 밤마다 계속 연극을 보면 미친 사람처럼 말하게 되지요.”
연극 <비평가>, 스카르파의 대사 中     

본 글에는 연극 <분장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연극을 사랑할까? 일반적인 취미 생활보다 비용이 많이 들고, 일회성과 일시성이라는 한계로 인해 다시 보기도 힘들고, 그 공연이 다시 올라올 지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데다 설령 다시 볼 수 있다고 한들 그 때 그 느낌을 온전히 되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예술을 어쩌다 사랑하게 된 걸까. 아름다운 음악도 없고, 즐겁고 신나는 내용만 담고 있는 것도 아닌 연극을 사랑하는 이유를 한 번쯤은 고심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연극계에 종사하는 사람이거나 연극 관람이 취미인 유형의 사람이라면 특히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연극을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무대를 위해 뛰어드는 사주팔자를 가졌는지 한탄하는 지인들과 커피를 한 잔 마시는 날이 있다. 그럴 때마다 그러게, 왜 연극을 좋아할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실 연극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종의 부조리극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서 우리는 연극을 좋아할까? 마치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과 같은 두 명의 사내처럼 우리는 극장으로 발걸음하지 않는가. 마치 죽어서라도 대기실에서, 객석에서 숨죽이며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것처럼 연극을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세상에 작은 역할은 없다지만 연극에는 주연과 조연이 정해져 있다. 모두가 없으면 안 될 중요한 배역이지만 주연에게 더 많은 서사와 시선, 스포트라이트가 가는 것은 한정된 시간을 가진 연극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공연 중인 이 극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자 주인공 니나 역할을 맡은 C는 오늘도 대사 연습에 매진 중이다. 20년째 그는 치고 올라오는 다른 여성 배우들 대신 굳건하게 니나라는 자신의 역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A와 B가 있다. 만년 대사 없는 남자 역할만 했던 A와 맥베스 부인의 프롬프터만 해 온 B. 그들은 흐릿한 거울 앞에 앉아 오래 전, 그들이 무대에 섰을 때를 이야기한다. A와 B는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며, 아직까지도 역할에 배우를 끼워 맞추고 있는 연출들과 그들이 하는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는  분장실에는 그만큼 오래된 이야기가 켜켜히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런 낡고 오래된 분장실에 D가 나타난다.     



 낡은 분장실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닐 것이다.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지 않는가. C와 D는 바로 그 이유로 갈등을 빚는다. ‘니나’ 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속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분쟁이다. 새롭고 신선한, 대사를 잘 외우고 ‘모두가 생각하는 니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D가 새로운 니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생의 쓰라림을 모두 겪고 그것들을 자신 안에 축적시켜 매일 밤 화장실에서 온 몸으로 우는 C가 니나의 자리를 유지해야 할 것인가.



 극중에서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두 배우 모두 자신만의 이유로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어떤 사람도 C와 D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둘의 모습은 마치 거울 속의 서로를 보는 것처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관객인 우리의 모습도 무대에 거울처럼 비춰진다. C에게 지속적으로 걸려오는 전화 속에는 돈 문제가 있는 남자 형제와 치매에 걸려서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D에게 걸려온 전화에는 서울로 상경해 고생만 하는 딸에 대한 어머니의 연민과 그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묻어난다.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을 법한, 그리고 그런 경험이 없더라고 충분히 ‘인간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법한 그들의 속내는 관객들로 하여금 배우와 배역, 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갈등 구조 속에서 A와 B는 싸움을 말리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저 관망할 뿐이다. A와 B는 단 둘이 있을 때만 ‘대화’ 가 가능할 뿐, C와 D라는 존재들과는 어떤 소통도 되지 않는다.  그 둘의 대화에서는 A와 B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심지어 그 둘이 싸울 때는 마치 분장실에 A와 B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언성을 높인다. 왜냐하면 A와 B는 죽은 사람귀신이기 때문이다원작 프로덕션의 연출을 보면 그 둘의 사망이 극 시작부터 뚜렷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한국 버전에서는 조금 다르다. A와 B는 대사로만 그들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전단지 붙이다가 전경에게 얻어맞아 몸에 멍이 들었다던 A나, 남자 때문에 또 목을 맸냐는 A의 물음에 스카프로 목을 가리는 B. 살아온 시대가 다른 두 사람은 죽어서 분장실에서 만났고, D가 불의의 사고에 휘말리게 되어 죽었을 때 셋은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왜 죽어서도 분장실을 떠나지 못했을까. D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장실을 뛰쳐나가려고 한다. 무대에 서겠다고 말이다. 그런 D를 말리는 A와 B는 단호하다. “관객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배우일 수 있겠어?”선배 귀신들의 말에 D는 답한다.“배우가 없는데 관객이 어떻게 생겨요.”나는 바로 이 지점이 연극인들이 연극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이자, 동시에 사람들이 연극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연극은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리자면 “순간 속에는 있지만 영원 속에는 없는 것을 가지고 영원을 보완해야 하는 유일한 예술” 이다. 



고전은 영원한 가치를 말하지만 영원한 가치는 결국 우연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그 우연에는 관객, 배우, 조명이나 음향 등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연극은 서로 알지 못하는 관객과 배우가 무대라는 공간에서 만나 암묵적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손을 잡는 예술이다. 관객마다, 배우마다 그 손을 잡는 방법이 다르고 손을 잡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희곡 작품을 가지고 공연을 올리더라도 매일 매일 올라오는 공연은 그래서 각기 개별적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배우와 관객은 서로 타자라는 층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층위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용납되는 연극이라는 무대에서 사람들은 힘을 얻고, 눈물을 흘리고, 또 연기하는 배우들은 역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인간에게는 어떤 개별적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배우의 몸짓이나 작품의 캐릭터가 뱉은 대사에 자신이 과거에 느꼈던 감정이나 혹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또, 어떤 작품이든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매 순간의 사건들을 경험하며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변하는 성격들이나 태도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랬지’ 라는 감정을 유발하거나 ‘내가 저래서 이렇게 됐어’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언제나 발생하는 사건은 아니지만,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연극의 어느 역할과 닮은 면이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안톤 체홉의 <갈매기> 그리고 <세 자매>는 배우 A,B,C,D 의 인생과 닮아 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인생은 무대를 보고 있는 관객의 인생과 일정 부분 닮아 있을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연극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삶과 연극은 필연적으로 닮아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뮤지컬처럼 우리의 인생에 매일 아름다운 음악이 깔릴 수는 없고, 언제나 우리의 인생이 웃음이 가득한 코미디 쇼일 수도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 어떤 연극 속에 당신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일상에서 쉬이 발현되는 감정이 아닐 것이며 당신이 스스로를 거울로 바라보는 행위만큼 객관적이자 동시에 주관적인 사건일 것이다. 그만큼 연극은 바쁜 삶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기 힘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예술이다. 나는 사람들이 연극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좋은 연극들이 많이 올라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어떤 빛나는 사건을 만나길 바란다. 그러나 연극이 각기 개별적이듯,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도 개별적일 것이다. 내가 연극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연극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질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묻는다.     


 

당신은 왜 연극을 사랑하는가? 

    

왜 연극에 미치나?      


흘러가는 것, 지나가는 것을 왜 그렇게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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