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개요와 과학과 철학의 관계
이 글은 고프리 스미스라는 저명한 철학자의 과학철학 입문서 <이론과 실재>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1. 과학철학이란?
(1) 저자의 과학철학에 대한 소개
저자는 약 100년 이전으로 돌아가 역사학적으로 과학철학의 발전과정을 돌아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학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과학이라는 학문이 제대로 철학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인식구조를 가진 채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대략 100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100년 전으로 돌아가 과학철학의 발전을 따져보는 것도 유의미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은 그 스스로 학문의 챔피언 지위에 오른 듯합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 철학사는 과학이 모든 학문을 과학으로 환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그 존재 스스로 방증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과학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과학이 과학철학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으로 잘 발전하고 있는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과학철학과 과학의 관계는 무엇이며, 과학철학은 어떻게 발전했을까요?
우선 과학이라는 워딩은 약 19세기부터 우리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고대 라틴어인 사이언티아라는 의미로 사용됐으며, 주로 자연에 대한 논리적인 추론이라는 의미였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의미상의 발전인 과학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진리적이라는 의미로도 확장이 됐다는 점일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적이라는 말의 수사적 용법은 대단히 많은 학문들이 스스로 과학적인 학문이 되고 싶어 하는 경향을 낳았고, 경제학이나 심리학, 인류학 등도 과학적 학문으로 분류할 수 있느냐는 논쟁을 낳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학문들도 과학적 학문으로 진입하느냐 여부가 그렇게 영양가 있는 논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든 학문은 그 학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독자적인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진보하는 과정이 중요할 뿐입니다. 도대체 그 학문들이 과학적이라고 판정받느냐 마느냐가 무슨 상관일까요?
<이론과 실재>의 저자인 고프리 스미스도 과학과 상관없는 학문 탐구 혹은 그렇지 않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과학철학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 간략하게라도 과학에 대한 정의를 해야 한다고 말하며 과학에 대한 다음의 두 조건을 제시합니다.
1. a general understanding of how humans gain knowledge of the world around them and
2. an understanding of what makes the work descended from the Scientific Revolution different from other kinds of investigation of the world
1. 인간이 그들 주변 세계(아마 자연세계)의 지식을 얻는 방식에 대한 전반적 이해
2. 무엇이 과학 혁명으로부터 이어져온 작업(진짜 과학)을 세계에 대한 다른 방식의 탐구와 다르게 만들어 주는지에 대한 이해(의역 : 과학 혁명 이래로 이어져온 과학과 다른 학문을 구분할 수 있는 조건이나 기준에 대한 이해)
(2) 고프리 스미스의 과학철학 분류
고프리 스미스는 자신의 책에서 과학에 대한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탐구를 수행하겠노라 예고합니다. 사실 철학이 과학으로부터 명백히 구분됨과 동시에 과학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이 크게 셋(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단히 타당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인식론은 지식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형이상학은 존재론이나 자연세계 자체의 성격을 탐구합니다.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제가 정리할 개괄적 과학 철학사에서 구체적으로 보이겠습니다.
또한 저자는 이 과정에서 기술적 이론과 규범적 이론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술적 이론이란 쉽게 말해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남자다라고 한다면, 이를 기술하는 데는 대체로 규범적 판단을 하지 않으리라 믿을 수 있습니다(셀라시안 인식론을 신봉하는 이들은 이 조차도 거부하긴 합니다.). 하지만 규범적 판단은 기본적으로 가치평가적입니다. 무언가가 좋다거나 나쁘다, 혹은 정당하다 나쁘다거나 하는 가치를 평가합니다. 여기서 보통 과학은 기술적인 탐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셀라시안 인식론을 신봉하는 저는 과학도 반드시 기술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 객관성은 과학의 기준일까?
여기서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과학의 조건으로 객관성(Objectivity)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기준은 대단히 모호합니다. 인간이 애초에 편견에서 벗어나 판단할 수 있을지 확정적이지 않으며, 객관성이라는 용어 자체가 물질적(Object)인 의미도 가지고 있으니 학문이나 탐구에 따라 의미를 달리 할 수도 있습니다. 셀라시안 정합론은 애초에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 게 "적절"한 지에 대한 규범 판단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라 하여 모든 판단은 기본적으로 주관성을 띌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단지 좀 더 정합적으로 주관적인 판단과 덜 정합적으로 주관적인 판단이 있을 뿐이죠.
2) 과학적 탐구 방법론을 확정할 수 있을까?
또한 "과학적 탐구 방법(Scientific Method)"을 탐구하는 방식도 너무 구닥다리가 되어버렸습니다. 17세기에나 데카르트, 베이컨 같은 철학자가 잠깐 말했을 뿐 애초에 과학이라는 학문이 대단히 창의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과학적 탐구 방법을 기술하거나 규정하는 작업 자체가 무용하기 때문입니다.
3) 과학의 구조에 대한 논리적 규명
그리고 20세기에는 주로 논리 실증 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과학적 구조에 대한 논리적 규명을 이루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주로 논리적 문장들 간 관계 혹은 문장과 증거들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시도였죠. 저자는 이러한 시도가 좀 더 실제 과학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저평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현실과 동떨어져 지나치게 추상적인 탐구를 한다는 것이죠. 다음에서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4) 과학적 탐구의 전략 탐구
그리고 저자는 차라리 과학적 탐구의 "전략"을 탐구하는 것이 과학의 구조를 해명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으리라는 뇌피셜을 남깁니다. 또한 누군가는 과학철학의 분과를 사회학, 심리학 같은 다른 학문으로 대체하려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사회학 같은 학문들은 스스로의 철학적 방법론을 개발하거나 독자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개척했을 뿐 과학철학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자는 차라리 이러한 학문분과가 과학철학에 모종의 도움을 줬을 뿐이라고 평가합니다.
2. 개괄적 과학 철학사
(1) 초창기 논리실증주의식 경험주의(라고 쓰고 비트겐슈타인 전기 철학의 추종자들이라 쓴다.)
이들은 비트겐슈타인 전기 철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괴짜들입니다. 주된 업적은 윤리학, 형이상학, 신학, 심지어 일부 사이비 과학을 박살내고 다닌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과학철학에서는 나름대로의 큰 업적을 낳았습니다. 바로 과학철학의 구조를 "검증주의" 개발로 해명하려 한 것이죠. 햄펠의 검증주의가 대표적입니다. 논리 실증 주의자들은 과학적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인식적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귀납적 탐구 방법을 "형식적으로" 정리하려 했습니다. 마치 기초 논리학에서 연역 추론 방법을 배우듯이, 귀납적 탐구 방법도 형식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 과학적 탐구 방법의 해명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모든 까마귀는 검다
1) 번 문장을 검증해봅시다. 우리가 어떤 까마귀의 사례를 접했는데, 그 까마귀가 검은색이었다면 1) 번 문장은 강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어떤 까마귀가 검은색이 아니었다면 1) 번 문장은 약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적 탐구 방법론은 최소한 간단한 형태에서는 이러한 귀납적 탐구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햄펠도 귀납적 방법의 형식화를 탐구하며 소위 말하는 "검증주의"를 구축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초창기 논리 실증 주의자들의 검증주의 탐구는 대단히 많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몇 가지만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과학적 명제의 질적인 강화가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이루어져야 하는지 큰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가령 1) 번 문장을 입증하는데 백만 마리의 까마귀가 동원됐고, 그 백만 마리의 모든 까마귀가 검은 색인 것으로 판명됐다면, 우리는 1) 번 문장이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사실 이론적으로는 무한히 많은 까마귀의 사례가 고려되어야 1) 번 문장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만, 이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유명한 햄펠의 역설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귀납은 아니라 연역 추론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런 걸 다 정리했다간 분량이 너무 많아질 테니 제끼기로 합시다. 궁금하시면 제가 추가적으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2) 포퍼의 논파주의
이 지점에서 대단히 많은 끔찍한 혼종 같은 논리 실증 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관련 강의를 진행해주신 교수님께서는 논리실증주의라는 용어가 당시 철학자들을 제자백가 같이 느슨한 흐름으로 지칭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학문을 하려는 흐름만이 있을 뿐, 그 내부 사상가들의 생각은 정말이지 아예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포퍼와 콰인이 대표적인 사례로, 이들은 보통 초기 논리 실증 주의자의 범주로 묶이지만 이들 스스로 논리 실증 주의자들을 비판하고 극복하려 노력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1) 논파주의(Falsificationism)
포퍼는 위에서 말한 귀납적 형식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 유명한 "논파주의(Falsificationism)"를 제안합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이나 명제의 강화가 아니라 약화와 반박입니다. 1) 번 문장을 증명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사례의 까마귀들이 필요하지만, 1) 번 문장을 비판하는 데는 단 한 가지 사례의 까마귀만 있으면 됩니다. 가령 우연히 동네 뒷산에서 하얀빛의 까마귀가 발견됐다면 1) 번 문장은 성공적으로 비판됩니다.
2) 구분의 문제(Demarcation Issue)
이렇듯 포퍼는 과학자들이 입증 증거를 찾는 것보다 반박하는 증거를 찾는데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포퍼는 사이비 과학과 진짜 과학의 기준, 다시 말해 "구분의 문제(Demarcation Issue)"에서 진정한 과학의 기준으로 반박 가능성을 제안합니다. 다시 말해 반박할 수 있는 이론만이 진짜 과학이고, 모든 종류의 반박으로부터 면역되어 있는 이론은 사이비 과학입니다. 그는 사이비 과학의 대표적인 사례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제안합니다. 또한 제 생각에는 요즘 유행하는 MBTI 심리테스트도 사이비 과학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MBTI 검사 결과에 정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도,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뿐 그것 자체로 MBTI가 성공적으로 논파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이 MBTI를 비판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요?
3) 포퍼의 한계
하지만 포퍼도 대단히 많은 반대에 부딪힙니다. 다음의 세 가지 반박이 대표적입니다. 첫째는 그렇게 반박이 중요하다면, 불과 1초 전에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하지만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는 이론 A와 이미 20년 전에 개발되어 수많은 검증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론 B 사이의 인식적 우열을 어떻게 가를지 모호합니다. A와 B 모두 단 한 번도 반박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긴 시간 동안의 응용과 사용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론 B가 A보다 좀 더 신뢰할 만한 이론인 것으로 보입니다. 포퍼는 이에 대해 검증과 확증을 구분하며 대응하려 했지만 크게 성공하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과학자들이 실제로 반박 사례를 찾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 모르겠으며, 단순한 몇 가지 반박 사례의 발견이 모든 과학이론을 뒤집는 것 같지는 않다는 반박이 있습니다. 가령 뉴턴 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우주로 들어가게 되면 무력화됩니다만, 여전히 거시 세계에서는 잘 작동합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양자의 미시세계에서는 무력화되지만 거시 세계에서는 잘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론이 잘 작동하지 않는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고 해도 과학자들이 그 이론을 폐기하는 것 같지 않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과학실험을 할 때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잘못됐을 수도 있는 수백 가지 변수가 존재합니다. 일론 머스크가 쏘아 올린 펠콘 X가 발사에 실패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단순한 기계의 오작동일 수도 있고, 초기 이론 조건을 잘못 잡은 탓일 수도 있고, 중간에 독수리가 부딪혀서 그럴 수도 있으며,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돌풍이 불어닥친 탓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코로나 백신을 접종받은 직후부터 심장의 통증과 현기증을 느꼈다고 할지라도, 단순히 이것 만으로 코로나 백신에는 건강상의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앞의 증거로 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수많은 지적인 배경이 필요합니다.
이렇듯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는 다양한 원인들이 있기 때문에 펠콘 X를 디자인한 이론과 코로나 백신을 만든 연구결과 자체를 뒤집어야 할지 의문입니다. 또한 확률에 대한 이론은 반박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 동전이 앞면이 나올 가능성은 50%이다.
1) 번 문장을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설사 동전을 던졌는데 뒷면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가능성을 제안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1)은 비판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1)을 완벽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무한히 많은 동전 던지기 시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률에 대한 모든 이론이 사이비 과학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화이자 백신의 부작용 확률에 대한 탐구도 사이비 과학일까요?
(3) 콰인의 전체론
이에 콰인이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하며 자신의 전체론적 인식론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콰인이 위 논문에서 제시한 두 도그마는 1)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의 구분 비판, 2) 명제의 개별적 검증 불가능성이지만 여기서는 흐름상 2) 번만 다루겠습니다.
콰인의 전체론(수능에서는 총체론이라고 소개했더군요)이란 어떤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다른 지식체계도 전체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예시를 들어보죠.
1) 코로나 백신은 인체에 무해하다.
우리가 1) 번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부수적인 지식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코로나 백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인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며, 무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수많은 다른 개념들을 다시 파악해야만 합니다.
만약 콰인이 옳다면 우리가 1) 번 문장을 비판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은 1) 번 문장이 아니라 1) 번 문장을 이루는 부수적인 개념을 비판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우리 주변 친구가 코로나 백신을 접종받은 직후에 심장의 통증과 현기증을 겪었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러한 고통이 코로나 백신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인체에 무해한 증상으로 봐야 하는지, 이러한 고통을 초래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앞의 햄펠이나 포퍼 식의 개별 문장에 입각한 비판과 검증은 대단히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검증은 전체적인 지식구조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콰인은 좀 더 급진적으로 나아가 인간의 모든 지식은 비판의 전체적인 구조속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단지 좀 더 비판에 취약한 지식이 있고, 비판에 상대적으로 면역되어 있는 지식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언뜻 보면 상대주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콰인도 대단히 많이 비판을 받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문장단위에 입각한 검증과 실험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인간이 과연 간단한 명제를 검증하는데도 의식적으로 모든 지식을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명제를 검증하는지 대단히 불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는 화이자 백신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화이자 백신이라는 말을 성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 이론과 패러다임
1) 과학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일종의 콰인식 전체론을 체계화한 과학발전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쿤은 과학이 연속적인 과학혁명과 패러다임(세계관)의 구축으로 발전한다고 보았습니다.
초창기에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이론 A, B, C가 있다고 해봅시다. 쿤에 따르면 이러한 이론들을 하나로 체계화한 세계관, 관점, 삶의 양식인 패러다임 1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패러다임 1 하에서 인간은 하부에 있는 다양한 이론들을 체계화하고 정리하면서 비판, 검증할 수 있는 것이죠. 가령 중세시대 당시의 패러다임은 신학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현재의 패러다임은(논란이 있겠지만)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따라서 토마스 쿤은 동시에 한 가지 패러다임만이 존재하고, 그 패러다임 내부에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점점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이상현상(anomaly)"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패러다임이 이상 현상들을 소화하는데 별 다른 문제를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하부에 있는 몇 가지 이론들을 폐기하고 재정립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이상현상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 과학은 위기(Crisis)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과학혁명은 위기만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기존의 이상현상들을 잘 극복함과 동시에 기존의 설명력도 잃지 않고, 앞으로 과학자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적절히 제안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구체적으로 제안되어야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령 기존의 신학적 세계관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현상들이 많이 발견되고, 신학적 세계관이 위기를 겪으면서도, 신학적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 즉 패러다임이 제시되어야 과학혁명이 완수됩니다.
그리고 쿤에 따르면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은 그저 과거 과학의 패러다임보다 조금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좀 더 정합적인 관점을 제안한 것에 불과합니다. 미래 인류는 현대 과학을 뒤엎을 새로운 패러다임을 언제든지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쿤은 모든 지식이 이론적으로 상대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이론 간의 우위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합니다.
2) 쿤에 대한 비판
하지만 이러한 쿤의 주장은 세 가지 비판에 직면합니다. 첫째는 실제로 패러다임이 정확히 무엇인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간은 동시대에 다양한 패러다임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화학의 패러다임과 물리학의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공존할 수 있어 보입니다.
또한 실제로 과학혁명이라는 것이 애초에 일어난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역사적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보통 과학혁명이 17세기에 일어났으며, 20세기쯤에 또 한 번 일어났다고 하지만 과연 당시에 일어난 게 과학혁명일까요? 사실 인류가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수행해오던 과학의 발전에 불과하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발전들을 과학혁명이라고 정의한다면, 최근 시대에는 과학혁명이 너무나도 자주 발생하게 된다는 문제점도 발생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쿤은 본인 스스로가 상대주의자, 심지어 회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사실 쿤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스스로 대단히 당황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따르면 애초에 인간이 진리적인 과학지식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저 임시방편식의 패러다임을 지속적으로 교체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약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현재의 패러다임은 명백히 과거의 패러다임보다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보한 것처럼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인식적으로 과거의 패러다임과 현재의 패러다임이 인식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핏 타당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과학 철학사를 간략히 정리해봤습니다. 사실 이러한 논의들의 기틀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학문분야인 인식론은 생각보다 대단히 복잡한 분야입니다. 지식이 어떻게 발전하고, 지식을 어떻게 정당화할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도 활발히 발전 중입니다. 이번에 배우는 과학철학과 간략한 형식의 인식론이 앞으로 여러분의 공부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