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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이온 Oct 14. 2023

순수 학문의 불순한 고뇌

순수 학문을 위한 대안적이고 자립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철학만큼 순수 학문에 어울리는 학문이 또 있을까?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철학은 순수 학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 학문인 철학을 배우는 곳은 그 어느 학문보다 불순한 고뇌, 즉 "앞으로 뭐 먹고 살지?"를 달고 사는 곳이기도 하다. 가끔 공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들을 만나면 앞으로 소크라테스 떡볶이를 창업할 예정이느냐는 등의 농담 아닌 농담을 듣기도 하니...

에피쿠로스의 화원. 소박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헬레니즘 철학자 에피쿠로스조차 친구들로부터 후원받은 돈에 기반해서 큰 정원을 사 학교를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우리 철학 동아리 친구들은 철학을 전공하신 분들이 일자리도 얻을 수 있고 사회인들이 인문학에 대한 서비스를 공급받을 수도 있는 모임 공간을 창업하고 싶다는 가슴이 부푼 포부를 가지게 됐다. 사실 이미 몇 달 전부터 대안적인 지식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우리 팀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사업성도 키우고, 국내 유수의 순수학문 전공자 분들께 보탬도 되고, 순수 학문에 대한 수요를 가진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위한 지식도 생산해내는 만능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개척하겠다는 부푼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진짜 세상에는 쉬운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우선 첫 문제는 이러한 철학의 고민이 비단 철학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원주에서 운영되는 "아란"이라는 선술집 겸 모임공간을 가보기도 하고, 여타 다양한 순수 학문을 전공하신 분들이 계시는 커뮤니티와 교류도 하는 등 견문을 넓혀보려 노력한 결과 철학만이 대안적 교육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 존재하는, 소위 말하는 "실용성"이 없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순수 학문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수학, 신학, 예술, 역사학 등의 학문은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함께 해온 선굵은 학문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학문들에 대한 열정이 확고한 사람이라도, 학업을 이어나가거나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할 돈이 없다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기 마련인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른쪽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돈이 단지 교환수단에 불과할 뿐이기에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우리는 우리가 다뤄야 할 순수 학문의 범주를 "철학"에만 국한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향성을 다시 설정하기 시작했다. 원래 우리는 사업이 시작된 토대가 교내에서 운영되던 철학 중앙동아리였기 때문에 철학을 중심으로 대안 교육 공간을 창업하고자 했다. 가령 플라톤 철학, 비트겐슈타인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철학 세션들을 개설하려 고군분투하며 몇 달을 발 벗고 뛰어다닐 뿐이었다. 하지만 곧 우리들의 한계를 깨닫고 미술사 세션, 교회사 세션을 신설했으며, 나아가 강사님이 구해진다면 자연과학쪽 세션도 개설하고자 한다. 순수 학문의 삶이 어려울수록 이들이 모두 힘을 합쳐 공동으로 발전하고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노력한다면, 조금이라도 대안 교육기관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지지 않을까?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곳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플라톤이 설립한 고대 교육기관 아카데미아의 정문에 걸려있던 글귀라고 전해진다. 보통 플라톤 철학은 "국가"를 대표적인 저작으로 하는 정치철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과거에도 다양한 학문들이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글귀라고 생각한다.


과연 현대인들은 "순수 학문을 모르는 자는 이 곳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말을 수용할 수 있을까?


    한편 위 글귀는 과거에는 찬란했던 영광을 가졌던 순수 학문들이 돈과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슬픈 생각도 들게 한다. 기하학을 배우는 수학, 플라톤이 가르치고자 한 철학, 기타 이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온 모든 순수 학문들이 언젠가 빛을 볼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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