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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이온 Oct 18. 2023

인문학 더하기 교회사 3

 "클레멘스의 제1서신"과 교회 직제의 형성

    모름지기 사람들의 생각은 가지각색으로 다르기 마련이다. 한때 동아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앞으로 동아리 세미나는 무엇으로 진행해야 할까? 대중성을 살려서, 공병호 교수가 쓴 "대한민국 기업흥망사"를 읽을까? 아니면 단테의 "신곡"을 읽을까? 아니면 다른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까? 우리 동아리는 철학 동아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리하게 우긴 덕에 공병호 교수가 쓴 "대한민국 기업흥망사"를 텍스트로 삼은 세미나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철학 동아리로서의 정체성과 성격을 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되었었지만, 이러한 비판과 논쟁도 어떻게든 지나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람이 많아지면 분쟁과 갈등도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렇듯 심지어 동아리라는 조그만 공간을 운영하는 데도 이렇듯 다양한 논쟁과 비판, 내부 갈등을 크고 작게 겪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앙을 대단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종교인들이라면, 그들이 속해있는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하고, 나아가 그들이 참으로 받아들일 교리를 무엇으로 할지를 규정하는 데 그 무엇보다 열을 내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 사회가 제정에 이르게 되면서 교인들의 수가 소소한 공동체를 넘어 제국 전체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크리스트교 교회에서 믿고 따라야 하는 교리를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혹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나 생각은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가장 중요하게는 교회 내부에서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면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둘러싼 진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는 "클레멘스의 제1서신"이라는 문건으로 초기 크리스트교 교회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유럽은 넓었고, 교인들은 많았으니 조직 내부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가 큰 문제로 떠올랐다.


    "클레멘스의 제1서신"이라는 책은 대략 서기 1~2세기 경 저술,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명한 초기 기독교 문건 중 하나이다. 이문건의 핵심은 4대 교황으로 간주되는 클레멘스 1세가 당시 크리스트교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분열과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쓰였다는 점이다. 다음 글은 이 글의 맨 앞부분에 등장한 내용인데, 천천히 읽어보자.


클레멘스 1세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저희에게 닥친 갑작스럽고도 연속적인 불운하고 불행한 일들로 인해서, 인정하건대, 여러분의 불화에 저희가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전혀 용납되지 않으며 이질적이고, 혐오스럽고 사악한 그 분립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클레멘스 1세는 명백하게 당시 1~2세기 교회의 내부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글을 뒤이은 내용들은 과거 교인들, 혹은 성인들이 내부에서 분란이나 경쟁이 일어났을 때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얻었는지, 혹은 그를 극복했을 때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를 사례로 이야기하며 교회 내부의 분쟁을 그만둘 것을 설득하고 있다.


    서기 1~2세기 당시에는 신도의 수가 대략 수천 명 언저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한 권에 담은 세계교회사 37쪽), 이미 당시에 교인의 수가 소규모 교회 공동체로는 적절하게 유지되지 않을 만큼 커졌기에 드디어 교회 내부를 "체계화"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십 수명에 불과한 동아리 내부에서도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를 둘러싸고 논쟁과 비판을 제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교인의 수가 수천으로 늘어났다니,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며, 이에 따라 내부 조직을 정리할 필요성도 생겨났을 뿐이다.


인간관계는 복잡하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이 많은 조직이라면 그 내부 인간관계도 잘 정리되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교인들 간 교리를 둘러싼 논쟁을 해결하는 조직의 원시적인 형태는 이미 서기 48년 경부터 소집되었던 사도회의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교세가 커지는 1~2세기에는 점차 영웅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격인 "사도"들의 선지적 활동들이 줄어들고, 대신 교회 내부 행정적 직책, 교회 직제 등이 체계화되며 강화된다. 일이 이렇게 되니 교리를 둘러싼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 사이의 권위와 위계질서(감독, 장로, 집사, 심지어 교황 등)가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교회는 더욱 체계적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 이는 교회가 일정 규모 이상 커지면서 나타난 내부 체계의 모순과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 나가며 성장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포인트다(한 권에 담은 세계교회사 38쪽).


교회 직제를 간단하게 나타낸 모습


    물론 이러한 조직적 체계화가 무조건 좋은 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닐 수 있다. 가령 종교적 해석이나 신앙에 대한 권위가 없는 일반 하층민들, 혹은 하급 사제들은 교회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기 쉬웠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권위 있는" 교회가, 소위 말하는 "정식 교리"와 "이단"을 규정하며 자신들과 다른 믿음을 공유하는 신도들에 대해 지극히 배타적으로 변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다.


교회의 권위는 마녀사냥을 비롯한 많은 끔찍한 일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최소한 당시에 교회 조직이 체계화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교는 당시 사람들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으며, 당연하지만 마구잡이로 해석되어 내부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피하고 신중하게 해석되어 교인 사회를 선도할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조금 더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종교적 교리를 해석하고, 적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분쟁을 해결시키고 갈등을 중재할 필요성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법분쟁의 최종적인 해결의 권위를 3심 제도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운영되는 대법원에 맡기고 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사회인들이 각종 사회분쟁에 대해 계속해서 따지고 싶다 하더라고, 대법원에서 내린 판결을 최종판결로 받아들이기로 정한 이상 3심 이상의 소를 제기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힘들다. 대법원은 사법분쟁을 종국적으로 해결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이러한 최소한의 교리를 정할 권위를 어디에 부여해야 할지를 둘러싼 나름의 논쟁을 펼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교회를 둘러싼 가장 큰 변화는 역시 "3세기의 위기"에 나타난 크리스트교 교회의 급격한 팽창이었다. 이 시기 크리스트교 신도는 제국 전체 인구의 약 10분의 1까지 팽창했으며, 크리스트교 교회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기에 이르면 이미 제국에서 크리스트교 신자를 찾아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미 막강한 부와 힘을 쌓아둔 크리스트교 교회와의 연합을 추구하고 자신 스스로를 크리스트교적 성인으로 끌어올리고자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과연 크리스트교는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급격한 성장의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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