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추적해 나가는 것은 지극히 어려우며, 실제로 소크라테스조차 구체적인 어떤 언명을 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그는 크게 세 가지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1) 미덕의 소유
2) 그러한 미덕을 현명하게 사용할 지혜
3) 스스로의 삶과 생각을 겸허하게 검토해 나가는 겸손한 삶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1) 인간은 무엇을 소유해야 하는가?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소유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살아가며 온갖 것들을 소유하고자 발버둥 친다. 하지만 몇몇 무언가는 아무리 소유해도 우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우리들의 행복과 무관한 요소들을 분별해 내는 작업도 분명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1) 외적인 소유와 행복 - 행복과 무관
이에 소크라테스는 물질적 소유가 인간의 행복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돈은 우리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결국 교환수단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우리들의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을 충족시켜만 준다면 그걸로 충분할 뿐이며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많은 돈이 있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돈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방종한 쾌락들은 어떤가?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즐거움에 대해 논한다. 하지만 즐거움도 우리들의 행복에 직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술을 먹으면 그때는 즐거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즐거움도 다양한 종류의 불쾌함을 동반할 수 있지 않은가? 실제로 술을 많이 먹으면 지갑사정이 궁핍해져서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으며 살지도 모른다.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어도 그러한 것들이 우리들의 행복에 직결되지는 않는 듯하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절세미인 초선은 타고난 미모로 인해 사도 왕윤과 동탁, 여포 사이에서 다양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며, 결국 마지막에는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렇듯 다양한 외적이고 물질적인 요소들의 소유는 우리들의 행복에 그다지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좀 더 정신적인 미덕들은 어떨까?
2) 미덕의 소유는? - 이것으로는 불충분
소크라테스는 용기와 절제를 비롯한 다양한 미덕들을 말한다. 가령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마다 다양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들이 정신을 부여잡고 두려움에 맞서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은 용기가 아닐까? 반면에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닥쳐도 이러한 어려움들을 용감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 기개가 없다면 우리들의 사회생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또한 소비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결국 어떻게 현명하게 소비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한다. 가령 돈이 없는데도 과도한 사치를 하고 다닌다면 빚더미에 앉게 되거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돈이 없어진 탓에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절제는 그 자체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악덕이 아닐까?
이렇듯 다양한 종류의 미덕들은 인간이 행복해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도 가능하다. 도대체 이러한 미덕을 발휘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할까?
3) 지혜야말로 가장 중요한 미덕 - 주지주의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미덕을 진정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키워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지혜가 없다면 용기를 적절하게 발휘할 수 없으며, 절제를 적절하게 발휘할 수 없다. 오히려 어정쩡하게 절제를 하려다가는 스크루지 같은 구두쇠가 될 수도 있으며, 용기를 미성숙하게 발휘하려다가 무모함이 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큰 가치이자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단연 지혜를 꼽는다. 지혜가 있어야지만 미덕들을 올바르게 발현시키고,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행복이란 적절한 미덕과 이들을 올바르게 사용할 지혜가 결합된 상태라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끝난 것일까?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지혜이긴 하지만, 그의 지혜에 대한 생각은 그의 다른 생각들 중에서도 가장 심오하면서도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너 자신을 알라"로 대표되는 "무지의 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 진정한 지혜는 무지의 지 - 그노오티 사우톤(너 자신을 알라)
아마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너 자신을 알라(그노오티 사우톤)"일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유명하지만, 이 말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소크라테스가 처음 한 말은 아니라는 점부터 짚을 필요가 있다.
그노오티 사우톤 - 너 자신을 알라
1) 그노오티 사우톤의 세 가지 의미
원래 이 말은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던 글귀 중 하나라고 한다. 이 말은 쉽게 말해 인간들은 인간들의 주제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너 자신을 알라"에서의 "너"는 사실 필멸적 존재인 인류 전체를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너"의 지시대상은 시대가 변화하며 조금씩 변화했다고 한다. 이 "너"는 어느샌가 귀족들이 평민들에게 사용하면서 평민들은 귀족들에게 대적하지 말고 주제를 알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신분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지배계급의 위엄을 공고히 하려는 워딩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이러한 모든 "너"의 용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요소들, 즉 인간적인, 혹은 계급적인 신분에 초점을 둔 것에 불과했다. 그는 외적인 것보다 좀 더 본질적인 무언가에 대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하고 싶어 했다. 그 본질적인 무언가는,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영혼"이었다.
2) 소크라테스적 용법의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표현을 인간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강화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이전 글에 작성했던 당시 아테네의 사회적, 정신적 위기적 상황을 들여다보아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이 소피스트들의 언변에 놀아나며 불필요한 법정 분쟁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라고 칭하며 사회의 전면에 나서게 되니, 이러한 혼란에 대한 회의감도 커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델포이 신전에서 '소크라테스야말로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의 내용을 들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의미심장한 신탁조차도 못마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그는 이러한 신탁조차 비판해 보고자 아테네에서 자신보다 지혜로워 보이는 사람을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온 아테네를 돌아다니며 거창한 숙제를 해나간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만나는 기술자, 정치인, 학자들마다 제대로 무언가를 아는 이들이 하나도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이 과정에서 당시 아테네 고위 정치인들을 괴롭힌 탓에 결정적으로 탄압을 받게 되었다는 설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자신이야말로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테네에 있던 자칭 현자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자신들이 아는 몇몇 분야에 대해서만, 그것도 조금만 알 뿐이다. 하지만 자신만큼은 아테네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인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테네 인들을, 나아가 국가 전체에 대해 캐묻고 다니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최종적으로 아테네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지적인 나태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최종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등애"의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3) 최종적으로 소크라테스가 하고자 했던 말의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며 소크라테스가 구체적으로 정립한 윤리학의 방향성, 혹은 이것이 정의다 하는 개념은 그 자체로는 지극히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구체적으로 무언가가 옳다고 말한다면, 바로 그 시점에서 자신이 주장한 무지의 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셈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무언가를 절대적으로 옳은 개념이라고 하거나 진리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입장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인들 전체, 나아가 그 이후에 태어났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사상에 귀를 기울이고 공부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울림을 주는 가르침 자체는 명확하게 정리할 수도 있을 듯하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지적인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고 사회에서 다루는 다양한 지식들을 쉬지 않고 검토해 나가려는 태도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끈기 있는 지적 탐구 태도를 강조함으로써 아테네 인들의, 나아가 인류의 지적인 게으름과 악덕의 타락을 스스로의 힘으로 정화하고 끊임없이 정신을 단련해 나갈 수 있도록 경계심을 심어주려 했으며, 개개인들에 있어서는 자신의 영혼이 직면한 나태함과 무지를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하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끈기와 힘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은 그야말로 "쉬지 않고 깨어있으라!"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3) 소크라테스는 Chat GPT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최근 Chat GPT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컴퓨터가 학습한 방대한 빅데이터를 토대로 다양한 대화 알고리즘을 도출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손쉽게 발견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AI가 발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점차 AI가 인류 대신 생각해 주고, 인류 대신 고민해 주게 된다면 인류 전체가 지적으로 게을러져서 이후에 등장할 어떠한 악덕 혹은 위기에 대해 스스로의 지성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대적인 고민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구체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어떤 말들을 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제자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