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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이온 Mar 12. 2024

0강 도입부 - 난세의 로마와 지중해세계

움직이기 시작한 난세

1.     공화국의 화려한 황혼

모름지기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다. 삼국지 역시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조조, 유비, 손권을 비롯한 걸출한 영웅호걸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든 바 있다. 삼국지 못지 않게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공화정의 후기도 마찬가지다.

영웅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자신의 아내 루크레티아의 정절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오만왕 타르퀴니우스를 응징하면서 위대한 공화국의 역사를 열어젖힌다. 그 후 공화국에는 브루투스의 맹세처럼 “그 어떤 왕도 두 번 다시 로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로마의 귀족들과 평민들은 독재로부터 로마를 해방시킨 최고의 의결기관인 원로원의 신성한 권위와 전통을 존중하며 살아왔다. 원로원의 권위와 위엄은 모든 로마인들의 선망이 되어왔고 원로로 일하며 로마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509년 이래로 약 400년간 이어진 공화국의 치세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로마는 그동안 귀족들의 원로원과 평민들의 민회가 타협과 양보를 이뤄오며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눈부시게 발전한 로마는 에트루리아, 마그나 그라이카, 갈리아, 나아가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일리리아 등 방대한 영토와 수많은 속주 식민지들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은 이러한 치세에도 번영을 구가하지는 못한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부와 권력, 군대가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걸인들이 양산되었으며, 지방의 농경지들은 방치되었고 극심한 흉년까지 찾아왔다. 평민들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빈곤해질 동안 귀족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축적해갔기에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어 원로원과 민회 간 갈등도 심화되어 예전 같은 화합과 타협의 정치 문화를 찾아보기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오래된 경제불황과 구조적 빈곤문제가 본격적으로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결국 군단병의 수적, 질적 약화였다. 당시 로마에서 군복무는 참정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일정한 재산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만 군단병에 입대해서 로마를 위해 봉사할 수 있었으며, 운이 좋다면 수많은 전리품과 함께 돌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는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빈곤해졌고, 강대해지면 강대해질수록 약해지는 딜레마에 빠졌다. 공화정 말기에 시작된 극심한 빈부격차의 악순환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질 정도였으며 이러한 모든 문제는 로마 공화국 최대의 패전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나타난다. 한때 지중해 세계에서 천하무적으로 군림하던 공화국의 군단병들은 기원적 105년경 게르만족과 펼친 “킴브리 전쟁”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약 8만명이나 몰살을 당하는 역사상 최대의 참패를 맞이하게 된다. 경제적 부는 빈곤을, 빈곤은 군사력의 약화를 낳는 이상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온갖 고난과 고통을 감수하고 역사속으로 뛰어나온 영웅들이 존재한다. 우선 당시 로마 공화국이 이러한 문제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들을 짚어보고, 비극적이었지만 화려했던 공화국 후기의 웅장한 난세를 열어젖히는 사건은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을 살펴보자.


2.     로마는 부유해질수록 빈곤해진다.

당시 로마가 부유해진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속주 식민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로마는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아(발칸반도의 서쪽 방면) 등 방대한 식민지들을 거느리며 승승장구한다. 로마 군단병의 자랑거리는 공화국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자영농 출신 민병대다. 이들 대부분의 평민군대는 공화국의 번영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했기에 집안의 농토를 기꺼이 팽개친 채 전쟁터에 나가 로마 공화국을 수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속주가 커지면 커질수록 징병된 평민들은 손해만 보게 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우선 로마 공화국은 속주를 통해 전통적으로 가장 귀중하게 취급되던 전리품들을 들여오게 된다. 바로 노예들이다. 당시 시골 자영농들은 순수하게 농사만 짓고 먹고사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하이켈하임 등 저명한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은, 당시 이탈리아 자영농들은 집안 소유의 작은 땅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것만 가지고는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들 평민들은 동네 주변 대토지 소유 귀족들의 농장에서 일품을 팔아 임금을 받거나 시장에서 다양한 잡역부로 일하거나 공공시설 건설사업에서 일하며 임금을 받으면서도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민들의 생활은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대토지소유자들과 귀족들은 이들 농민들을 피호민으로 보호해주고 소소한 사회적 갈등들을 중재해주는 “어르신”이 된다. 또한 평민 피호민들은 후원자들을 지지해주고 존경해주며 그들의 권위와 사회적 지위를 지지해주고 선거때는 이들을 위해 투표해주는 바람직한 공화정의 관습과 전통이 생긴다. 이러한 바람직한 관습과 전통은 원로원과 민회가 서로를 이해해주고 타협해주며 크고 작은 사회갈등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줬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직했던 사회구조는 속주에서 방대한 노예들이 흘러들어오며 망가지게 된다. 노예들은 주로 대토지소유자나 귀족 등 부유층들이 구매해서 자신들의 농장이나 시장 일 등에 투입했고 공공시설 건축 등에도 자주 동원된다. 귀족들은 노예 구입비만 지출하며 앞으로 영구적으로 인건비를 지출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노예들을 거느렸고, 농장경영도 아무런 무리 없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평민들은 막대한 노예 노동력 유입으로 동네 주변에서 임금을 얻을 수 있는 창구가 막혀버렸고, 가족이 가지고 있는 조그만 땅만 가지고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점 빈곤해져간다.

한 번 이러한 이상한 경제구조가 잡히고 나니, 평민들이 몰락하는 데는 엄청난 가속이 붙어버렸다. 로마 시의 인구는 기원전 150년부터 130년까지 약 50만명으로 폭증한다. 이들 증가한 로마 시의 인구는 물론 지방에서 몰락한 자영농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평민들이 모두 수도로 몰려가버린 덕에 지방에 그들이 방치하거나 귀족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기고 온 토지들은 귀족들의 배만 불려줬고, 귀족들은 그 돈으로 더욱 막대한 노예를 구입해서 말 그대로 대농장을 경영하는 “라티푼디움”을 만들어 왕처럼 군림한다.

여기에 평민들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구조가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귀족들이 라티푼디움을 경영하며 생산해내는 식량생산량 보다 이탈리아 자영농들이 몰락해서 줄어든 식량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재는 겹쳐서 나오는 법. 그 즈음에 곡창지대 중 하나였던 시칠리아에서 BC135년에 대규모 노예반란이 일어나 식량생산이 급락했고 심지어 그 즈음에 지중해세계 전역에 심각한 대흉작까지 겹쳤다고 한다. 하이켈하임은 지중해 지역 곡가가 BC140년과 138년 사이에 500%, BC140년부터 127년까지는 1200%가 급등했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실증적인 연구들이 축적되어 있는 바, 이 정보에 따르면 당시 로마인들의 하루 식비는 현 한화로 약 30만원 정도에 이르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화폐단위




 나는 여기에서 노동가치론을 토대로 고대 로마시대의 가격을 현대 한국사회 가격으로 환산하고자 한다. 귀금속가치론도 역사학에서 자주 쓰이기는 하지만 시대에 따라 화폐가치 상승, 하락이나 귀금속 가격의 변동을 하나하나 추적해가며 파악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귀금속가치론을 도입해서 당시 물가를 계산해보면 전반적인 물가가 지나치게 높게 잡히는 문제도 발생했다.

고대 로마의 1파운드 무게 빵의 가격이 2 아시스였다고 한다. 1데나리우스는 임금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이라고 하니 대략 최저시급 기준 8만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세스티르티우스는 4분의 1 데나리우스고, 1아시스는 4분의 1 세스티르티우스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1아시스는 5천원 정도이고, 2아시스는 대략 1만원이다. 그렇게 고대 로마에서 식사 한끼로 빵 1파운드가 적당했다고 한다면 당시 로마에서 한끼 식사 값이 대략 1만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격에서 1200%가 올랐다면 한끼 식사값이 대충 싸게 잡아도 10만원에는 이르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인들은 하루 식비로 한다면 하루 세끼로 무료 30만원을 지출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다보니 대부분의 평민들은 도저히 지방에서 가족 소유의 조그만 토지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나마 버티던 사람들도 계속해서 로마에 몰려들어 이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는 황폐화되어 식량 생산량은 다시 줄어들었다. 


“하층 계급의 임금 노동자는 비교적 호황의 시대에서도 경제적으로 뒤쳐진 생활을 했을 진데, 기원전 130년대의 불경기의 수년간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광범한 실업과 구제 불능의 빈곤을 초래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평민들도 노예를 가질 수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법적으로 안될 것은 없다. 하지만 당시 노예 가격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보통 남성 노예는 한명당 약 620데나리우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1데나리우스는 평범한 임금 노동자의 하루치 일당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현대 한국의 최저시급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8만원이라고 할 수 있는 바 노예 한명은 약 49,600,000만원정도에 매매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굳이 산다면 사지만 대단히 부담되는 가격이니만큼, 돈 많은 귀족들은 이러한 노예매매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을 것이며, 이 가격을 지불할 여력이 없는 평민들은 급속도로 몰락했다. 현재 4차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노동력 대체 문제를 겪고 있는 한국사회가 참고해야 하는 부분이다.

또한 이러한 경제적 구조불안정으로 인해 로마사회 전체가 경제적 번영 속에서도 경제적 불황을 겪게 되는 이상한 상황에 빠진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도 않은 귀족들만 엄청난 부를 축적할 뿐, 대부분의 세금을 내주는 자영농들이 대부분 몰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화국은 공공 건축 토목 사업도 거의 대부분이 중단되었고, 이러한 건축 사업에 참여해서 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던 노동자들도 덩달아 몰락하게 된다. 

빈민들의 삶을 버겁게 만드는 것은 로마로 과밀집된 인구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모든 인구가 로마로 몰려들었기에 집세가 엄청나게 상승했다고 한다. 일가족이 누우면 바로 방이 꽉차는 비좁고 열악한, 심지어 건축적으로도 불안정한 집들의 집세로 2000~3000세스테르티우스를 일년에 4번 지불했다고 한다. 1세스테르티우스는 데나리우스 은화 가치의 4분의 1이었다고 하니 약 2만원 정도의 주화이다. 그런데 2000세스티르티우스는 약 4000만원, 3000세스티르티우스는 약 6천만원이고, 이를 일년에 4번 지불했다고 하면 1년 집세가 약 1억 6천만원에서 2억4천만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이 없어 로마로 몰려든 빈민들이, 심지어 로마의 일거리도 노예들한테 모조리 빼앗기는 마당에 이러한 막대한 집세를 지불해가며 비좁고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집에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로마에서 빈민굴을 지어 살며 로마 시내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감을 야기했으며 대부분은 원로원에 대한 극심한 적개심으로 무장하게 된다.

당시 평민들이 귀족들에 대해 가지게 된 적개심은 새로운 형태의 것이었다. 원래 로마 공화국은 민주성을 극대화한 대신 행정제도가 대단히 부실했기 때문에 지방과 중앙, 나아가 지방 사람들 간 관계성을 유지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문화적인 연줄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로마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관습”이 클리엔텔라였다.

로마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복잡하게 얽힌 후견인, 피호민 관계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쌍무적 관습계약관계인 클리엔텔라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고대 로마가 농경중심 사회였기 때문이었는데, 평민들은 주로 가족끼리 경영하는 소규모 농장과 대토지 소유 귀족들이 주는 농장 일감, 시장 일, 나아가 공공건축 사업에 노동력을 제공하며 임금을 얻어 생계를 유지했다. 평민 자영농들이 가지고 있는 토지만으로는 도저히 생계가 불가능했음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따라서 평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피호민이 되어 대토지 소유 귀족들을 후견인으로 섬기는 관계를 맺어야 했고, 후견인을 위해 성실하게 일을 해줌과 동시에 사회적인 존경과 존중을 표현해줄 의무를 부담했다.

물론 이러한 피호민의 의무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무적인 것이었다. 후견인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존경을 표해주고, 심지어 성실하게 일까지 해주는 피호민을 보호해줄 “관습적 의무”가 있었다. 물론 이는 법적인 의무는 아니었지만, 만약 어떤 후견인이 피호민들을 일방적으로 착취만 하면서 이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해주거나 적절한 경제적 보호조치를 해주지 않거나 갈등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피호민들의 존경심을 잃고 다른 귀족들에게 피호민을 빼앗겨버리게 된다. 거의 모든 후견인들은 지방, 나아가 중앙에서 명망을 얻기 위해서 되도록 많은 피호민들을 거느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피호민의 지지와 표는 자신이 로마 중앙 정계에서 명망있는 관직으로 나아가고 선출되는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견인들은 최대한 많은 피호민들을 거느리고, 이들로부터 최대한의 존경심을 얻어내고자 노력했다. 만약 자신이 피호민들을 적절하게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피호민들은 곧 다른 귀족들의 피호민으로 들어가 언제든지 자신의 칼에 등을 꽂을 수 있으며, 만약 피호민들이 후견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느끼게 된다면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유에 따라” 농민반란까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클리엔텔라는 로마가 가지고 있는 지극히 부실했던 행정제도를 보완해주고 지방과 중앙을 밀접하게 연결해주는 끈이 되어줬으며, 로마 공화국이 공화정을 유지하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강화시키는데 큰 힘이 되어줬다. 하지만 막대한 노예가 유입되고 라티푼디움이 확대되며 이러한 클리엔텔라에 기초한 농촌적인 유대감이 점차 해체되고, 오히려 도시적이고 상업적인 이해관계에 기초한 유대감이 강화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복잡한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최소한 당시 로마에 몰려든 몰락한 자영농 빈민들이 당시 귀족들과 원로원에 대해 극심한 적개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이해하는 데는 대단히 중요하다. 당시 몰락한 자영농 평민들은 거의 100퍼센트 자신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해줄 관습적 의무를 부담하던 후견인들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느낀 것이다. 후견인들이 아무리 노예를 거느리며 부를 축적하고자 했어도, 심각한 빈곤에 처한 피호민들을 경제적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수백년간 이어져온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보호해야 했다. 그런데 피호민들은 수백년간 이어져온 클리엔텔라의 사회망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버림받고 걸인이 되어버렸으니, 이들이 불만을 호소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어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러한 사회적 불안감과 적개심을 적절하게 이용해서 자신을 로마의 빈민들을 보호해주고 이끌어주는 후견인으로서의 독재관 이미지를 구축해내는데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귀족과 평민, 나아가 원로원과 민회 간 분열과 갈등, 적개심의 심화는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내전의 형태로 불거지기도 하고 스파르타쿠스의 난이라는 국가 비상사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누구든 로마와 지중해세계를 평정하고 치세를 가져오고자 하는 이는 이러한 복잡한 불신과 적대감, 파벌간의 분열을 봉합하고 다시 한번 타협과 연대를 이끌어야 하는 불가능해보이는 위업을 달성해야만 한다.



3.     로마는 강해질수록 약해진다.

하지만 로마 공화국의 본격적인 위기감을 고조시킨 것은 이러한 급증하는 빈민계층으로 야기되는 로마 군단병의 약화이다. 당시 군제는 징병제로 운영되었지만 재산과 신분에 따라 입대할 수 있는 군종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며, 일정 재산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징병될 수 없었다.

각각 재산 기준을 확인해보자. 앞서 정리한 표의 노동가치론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l  건국 초기 켄투리아

총 193개 켄투리아대 – 재산기준이고 소득기준이 아니다.

에퀴테스(기사)계급 18개 켄투리아 : 재산 기준은 50억원 정도(1계급보다 10배 이상) + 말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제1계급 : 8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100,000 아스는 대략 5억원이다.

제2계급 : 2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75,000 아스는 대략 3억7천5백만원이다.

제3계급 : 2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50,000 아스는 대략 2억5천만원이다.

제4계급 : 2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25,000 아스는 대략 1억2천5백만원이다.

제5계급 : 3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11,000 아스는 대략 5천5백만원이다.

목수, 대장장이, 나팔 연주자, 코르누 연주자, 연락병 켄투리아 1개씩인 5개 켄투리아

제5계급 미만으로는 투표권을 가진 켄투리아를 파견할 수 없으며, 군단병으로 복무할 수도 없다.

흥미로운 점은, 만약 에퀴테스 계급과 제1계급이 어떤 후보, 혹은 어떤 정책에 대해 몰표를 던진다면 이미 그것만으로 과반수 표를 넘겨 그대로 투표가 사실상 종료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초창기에 만들어진 이러한 재산요건은 무산계급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고도 한다. 경제적으로 빈궁한 사람을 군복무에 징병할 수는 없으며, 그런 이들이 적절한 장비를 구입하기를 바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또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정치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는 것은 켄투리아회에 자신들의 재산 계층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을 파견해서 투표할 수 있는 참정권을 얻는 것으로 직결되었기에 의무가 면제되는 만큼 권리도 줄어드는 구조였다. 그래서 난세 당시, 즉 내가 발제하는 시대의 선거법은 아래처럼 개정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l   기원전 150년 경 켄투리아


총 373개 켄투리아의 193개 표의 행사

제1계급(에퀴테스(기사) 계급과 통합) : 7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100,000 아스는 대략 5억원이다.

(공교롭게도 이전 제1계급과 에퀴테스 계급 사이에는 실질적 재산의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통합이 가능했다고 한다.)

제2계급 : 7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75,000 아스는 대략 3억7천5백만원이다.

= 위 두 계급이 193표 중 88표

제3계급 : 7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50,000 아스는 대략 2억5천만원이다.

제4계급 : 7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25,000 아스는 대략 1억2천5백만원이다.

제5계급 : 70개 켄투리아, 재산 기준인 11,000 아스는 대략 5천5백만원이다.

           = 위 세 계급이 100표

프롤레타리아 계급 : 23개 켄투리아, 무산자 계급이라 재산요건이 없다.

= 프롤레타리아는 5표


이러한 선거법 계정은 켄투리아의 수가 늘어난 것에 비해 실질적으로 귀족의 표 수가 덜 줄어든 것으로 보이긴 한다. 무산계급도 조금이지만 참정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최소 참정권 재산 요건이 낮아졌음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상류층이 가지고 있는 표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음이 특징이다. 또한 옛 에퀴테스 계급과 1계급, 2계급이 특정 후보나 정책에 몰표를 던진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투표가 종료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좀 더 민주적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무산계급도 군대에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의미했는데, 이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스스로 무기를 구입해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사람들까지 군단병으로 징병해서 로마 군단병의 “질적 약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치는 일견 의의가 있었지만 105년 대참사를 막지는 못했다.

그런데 당시 무산계급이 너무나도 많아지게 되면서 “적절한 조건으로” 군복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얼마나 심각한지 당시 군단병을 모집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집정관이 직접 전국을 다니며 모병을 할 정도였다. 구체적으로 당시 로마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켄투리아에 참정권을 걸 수밖에 없던 계층이 전체 로마 성인 남성 시민의 20%나 되었다고 하니, 전재산을 5천만원도 모으지 못한 로마 시민의 수가 5분의 1(약 20%)이나 되었다는 것이며 로마 사회가 끔찍할 정도의 빈부격차에 신음하고 있었음을 할 수 있다. 그나마 당시 군복무를 할 수 있는 평민들도 재산의 감소가 가속화됨에 따라 당시까지만 해도 사비를 털어 가지고 가야했던 무기와 장비의 질적 수준도 심각할 수준으로 낮아졌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당시 로마인들의 심각할 정도의 빈부격차 악화는 군단병의 수적, 질적 악화를 동시에 일으키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아가 빈민들의 참정권은 약화되어가니 빈민층이 로마 공화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적개심은 점점 높아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의 빈부격차가 악화되어가면서 모두가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야 만다. 당시까지만 해도 천하무적이었던 로마군이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대패하면서 몰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원적 105년경 게르만족과 펼친 “킴브리 전쟁”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약 8만명이나 몰살을 당하는 역사상 최대의 참패를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로마는 어떻게든 변화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퍼지면서 원로원 내부에서도, 나아가 원로원과 민회 사이에서도 끔찍한 분쟁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곪을 대로 곪아온 로마사회의 문제는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가문의 젊은 천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터져나온다.


4.     기원전 130년 경,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 “농지법”과 “곡물법”

티베리우크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을 살펴보면 뭔가 묘한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농지법, 곡물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개인 당 소유 가능한 최대 농지 크기를 제한하자. (320에이커, 391736평)

2)     공유지(주로 정복지)를 편법적으로 차지한 귀족, 부자들을 색출해 처벌하자.

3)     귀족, 부자들이 옛 자영농 평민으로부터 구입한 토지를 재분배해주자(국가 예산으로 매입해서 분배).

4)     공유지를 자영농 평민들에게 분배해주는 것을 대가로 이들이 군단병에 복무하도록 하자.

5)     정부는 비싸진 곡물을 구입해서 저렴하게 되팔아주자(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6)     + 4)에 의해 피해를 입을 이탈리아 동맹국들을 위해 이탈리아 동맹국들에게도 투표권과 로마 시민권을 주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은 원로원이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안을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감을 가지고 원로들이 직접 자기들의 손으로 그라쿠스 형제를 때려죽이는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위 토지개혁안은 이미 원로원 내부에서도 길게 논의가 되어오던 방안들이랑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위 토지개혁안을 작성해준 것은 “프린켑스”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당시에 엄청난 명성을 떨치던 법률전문가인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였다. 특히 이들은 모두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가문 파트리키 출신들이었으며, 이 중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바로 작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최고 명문귀족 출신의 원로였다. 다시 말해 그라쿠스의 토지개혁안은 귀족들의 고리타분한 경제적 이권다툼 때문에 반발을 샀던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귀족과 원로들은 그라쿠스의 토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원로원에서는 공유지를 편법으로 차지하고 라티푼디움을 경영하는 귀족들과 에퀴테스들을 공식적으로 “감찰관”들을 파견해서 횡령죄로 고발해서 처벌해오기도 했다. 원로원은 학식이 높은 귀족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고 이러한 부도덕한 편법과 공화국의 정치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체제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안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원로원은 “신체불가침권”이라는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채 민회의 호민관으로서 합법적으로 가지고 있는 입법권한테 따라 합법적으로 법안을 통과시킨 것에 대해 발작을 일으키며 반발을 했던 것일까?

이는 그라쿠스 형제가 당시 로마 공화정의 정치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국지에 익숙하니 삼국지로 비유해보자. 아무리 원술, 원소, 조조 등 군벌들이 실질적인 힘이 강력했으며 법적인 권한도 많았다고 할지언정 천자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월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천자를 존중하고 예법을 지키는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일처리를 추진하는 “정치적인 감각”은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천자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수많은 정치적 부담을 감내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원술은 칭제를 범했기에 불필요하게 적들을 많이 만들었고, 동탁은 대놓고 천자를 폐위하고 새로운 천자를 앉히는 등의 패악질을 저질러 악명을 떨쳐버렸다.

로마에서 천자의 권위와 정통성을 담당하는 것은 “원로원” 그 자체이다. 로마 공화정은 원로원이 만들었으며, 원로원은 로마의 정치, 입법, 사법, 행정, 명예, 권위, 나아가 모든 전통의 기원이자 신들이 보살피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라쿠스 형제는 민회가 가지고 있는, 지극히 법적인 권위만 믿고 원로원을 아예 무시한 채 말 그대로 법적인 절차와 권한에 따라 법을 통과시키고 개혁을 밀어붙이려 했다. 원로원은 정신을 차려보니 토지개혁안이라는 중대한 법안이 자신들과 어떠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민회에서 일방적이고 독단적으로 통과되어 추진되려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평범하고 사소한 법안이 그렇게 통과된 것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국정 전반에 걸친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 명백한 토지개혁 법안을 원로원과 어떠한 타협도 없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려 했다는 것은 “원로원 없이” 국정을 이끌어가려는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원로원은 이러한 행위가 원로원의 전통과 권위를 현저하게 무시하고, 정치에서 원로원을 배제하려는 정치 쿠데타 비슷한 행위로 인식했다.

이러한 행위를 다시 삼국지에 비유해보자. 당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저지른 행위는 천자의 조서를 작성하는데, 천자의 조서에 천자의 옥새가 아니라 조조 개인의 인장을 찍어버리는 엄청난 패악질을 저지른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인 것이다.

원로원이 그라쿠스 형제들을 살해한 논거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인식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원로들은 “그라쿠스 형제들이 참주가 되려 한다!” 라거나, “그라쿠스 형제가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외치며 이들 형제들을 살해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원로들은 로마 최고의 엘리트이자 가장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신체불가침권”이라는 법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호민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구타로 살해했다는 사실이 믿기는가? 원로들은 호민관의 신체불가침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면서까지 어떠한 가치를 지키려는 무리수를 뒀던 것이다. 그것은 로마 공화국의 근원이자 모든 정통성의 원천인 “원로원의 전통”이다.

이러한 인식에 더욱 공감할 수 있는 것은 티베리우스 암살 이후 토지개혁의 추진 과정이다. 원로들은 이러한 토지개혁안이 입안되고 추진된 것에 대단히 기뻐하며 그 누구보다 더욱 열심히 토지개혁을 추진하고자 애쓴다. 실제로 몇몇 원로들은 자신이 이룩한 토지개혁안의 업적을 자랑하며 더욱 많은 평민 피호민들을 긁어모으려고 선전하기도 했다. 나중에 공화국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명문 귀족 가문 출신 소 카토는 평민에게 저렴하게 배급되는 곡식의 양을 2배로 늘리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는 평민에게 분배되는 토지의 면적까지 늘려버린다. 다시 말해 세간의 인식처럼 명문 귀족 출신 원로들은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안 그 자체에 반대한 것은 절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라쿠스 형제가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심에 눈이 멀어 원로원의 권위를 중대하게 무시하고 능멸한 것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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