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 눈이 딱 싫다.
3년 전 크림이(우리 집 냥이)를 식구로 맞았다. 코로나가 매섭던 2020년. 3학년이던 아이는 학교도 미술학원도 가지 못한 채 하루종일 혼자 밥 먹고, 혼자 수업 듣고, 혼자 책 읽고, 혼자 놀고, 혼자 기다렸다. 그 당시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집에 혼자 있을 아이 생각에 종종 눈물이 나던 시기였다. 처음으로 외동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당연히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크림이지만 그때는 아이에게 친구와 동생역할을 해주어 고마운 생명체였다. 아이 친구 엄마에게서 전해 듣길 우리 딸이 그 집에 놀러 가서는 크림이가 있어 이제는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니.
차츰 크림이의 존재를 주변 식구들도 알아갈 때쯤 시어머님이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크림이 어디가 좋으냐고. 아이는 '눈이 제일 좋다' 말했고, 어머님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양이 눈이 딱 싫다' 하셨다. 아이와 나는 말없이 눈을 맞췄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줬다.
나도 그 눈을 싫어하던 때가 있었다. 유심히 바라본 적도 없으면서 공포영화나 책에서 영악한 동물로 묘사된 고양이의 눈빛이 어쩐지 불길하다 여겼고, 울음소리도 사연 있는 집 갓난아기 소리 같다 생각했다. 캠핑장에서 우연히 만난 고양이에게도 나는 얼음이 됐었고,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 고양이 카페에서도 개냥이처럼 다가오는 냥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크림이와 함께 살기 전까지는.
3개월 된 작고 앳된 고양이가 우리 집에 왔다. 구석을 찾아다니며 살 집에 적응하는 동안 나는 자주 몸을 낮춰 크림이와 눈을 맞췄다. 어느 날은 수납장 아래에, 또 어느 날은 책장 빈 공간에 웅크리고 있는 크림이에게 눈뽀뽀(고양이 눈인사 방법으로 눈을 깜~빡 하며 답장을 보내줌)를 받으려 집요하게 쳐다보며 질척(?) 거렸다. 고양이 눈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다 보면 스스로 놀랄 때가 많다. 이유는 두 가지.우선은 인간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빛이 너무 깊고 사랑스럽기때문이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 때문에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이들도 있던데, 그 눈빛이 나를 관통해 어떤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다 느낀다면 너무 유난일까. 아이 키울 때도 듣지 않았던 팔불출 소리를 남편에게 종종 듣는 요즘이다. 놀라는 두 번째 이유는 마흔이 넘어서도 쓸데없이 낯을 가리는 내가 누군가의 눈을 그렇게 오래도록,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신기하기 때문이다. 극 I형인 나는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쩐지 쑥스러움이 밀려오면 슬쩍 시선을 돌리곤 한다. 결혼생활이 오래되니 남편 하고도 눈맞춤 할 일은 그닥 없다. 그런 내가 크림이 눈은 녀석이 피하기 전까진 주구장창 쳐다볼 자신이 있으니. 고양이의 눈은 깊고 선명하고 도도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 또 좋은 말 없나? ㅎㅎ
최근 독서모임 '글쓰담'에서 함께 읽은 <공감의 반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 말한다. 오늘날 가속화하는 혐오와 분열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라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감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오히려 공감을 깊이 하면 위기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우리의 편 가르기는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온다.
장대익,『공감의 반경』, 바다출판사, 2022
공감은 일종의 인지 및 감정을 소비하는 자원이므로 무한정 끌어다 쓸 수 없기에 자신이 속한 집단(종교적, 정치적, 혈연, 지연 등)에 공감을 과하게 쓰면 다른 집단에 쓸 공감이 부족해진단다. 그래서 자기 집단에만 깊이 공감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내집단 편향을 만드는 깊고 감정적인 공감보다는 외집단을 고려하는 넓고 이성적인 공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공감의 깊이보다 넓이에 중점을 두고 공감의 반경을 넓혀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공감'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 여겼는데 한쪽으로만 흘러서도 안 되겠구나 생각해보게 했다.
크림이를 식구로 맞이하기 전까진 나도, 곧 아기가 태어날 직장동료 집에 고양이가 두 마리나 있다는 말에 고양이랑 신생아를 어떻게 같이 두냐며, 어디다 맡겨놔라 섣부른 조언을 했다. 네이비색 재킷에 고양이 털이 잔뜩 묻은 채 출근한 그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고양이 눈을 무서워했고, 동네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울음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내가 지금은 고양이 눈빛을 쫓아다니고, 울음소리가 귀엽다며 동영상을 찍어대고, 옷이며 방이며 차 안이며 고양이 털을 잔뜩 묻혀 다닌다.
누구나 이쪽이 될 수도, 그 너머 반대편이 될 수도 있다. 때론 그 반대편이 고양이 눈을 싫어하는 나의 어머님처럼 가까운 사이일 수도. 얼마 전 천안시에서 전국 최초로 '길고양이 보호 조례'를 발의했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보류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전히 고양이 눈과 울음소리를 싫어하고, 불길한 존재, 도둑고양이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고양이를 사랑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도 헤아리려 노력 중이다. 책에서도 정서적 공감을 넘어서 이해하려는 인지적 공감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니.
어떻게 공감의 반경을 넓힐 수 있을지 크림이의 눈을 보며 생각해 본다.
덧. 그런 의미에서 크림이 눈 한 번 보고 가실게요~
"까꿍! 내 눈 어딨~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