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집이니까요. 서영의 두 번째 이메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는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이름에 진심인 문주 잊지 않겠습니다.
조해진,『단순한 진심』, 민음사, 2019, p.17
어릴 때 프랑스로 입양된 '나나'. 입양되기 직전 자신을 1년 동안 보호해 준 기관사가 지어준 한국 이름 '문주'. 나나는 '문주'라는 이름의 의미를 찾아가며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다고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를 이야기한다. 조해진 작가의 <단순한 진심>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도 이름에 꽤 진심인데..
사람들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한다. 쓸데없는 자랑이라 여겼지만 살다 보니 누군가의 이름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불러주는 게 따뜻한 일임을 알겠더라. 그러니 무언가의 이름을 짓는데도 제법 신중하고 자못 진지하다. 나의 작가명 '새날' 역시 몇 날 며칠 머리를 쥐어짜가며 수십 개의 이름을 떠올린 후 최종 선택한 것이다. 오늘은 '새로운 날' '새롭게 날다'의 뜻을 품고 있다. 십수 년 직장생활을 끝낸 시기에 기대와 다짐을 담아 만든 이름이다.
다른 작가들의 필명도 작가 소개와 함께 유심히 보며 기억하고, 길을 걸으며 가게의 이름인 간판도 흥미롭게 살펴본다. 어쩐지 이름과 사람이 닮아 있기도 하고, 식당 분위기와 가게명이 찰떡같기도 하며, 필명과 글의 느낌이 비슷하기도 하다. 이름이 정체성을 드러내니 그것에 늘 진심이고 싶은 사람이다.
제주여행에서 만난 나무 이름을 소개하려 글을 시작한 건데 구구절절 서론이 길었다.
여름휴가 전부터 딸아이가 가보고 싶다던 제주 동쪽에 있는 '스누피 가든'. 만화 속 캐릭터들이 주인공이지만 가든이라는 이름답게 넓은 규모의 정원이 가꾸어져 있다. 이야기하며 둘러보며 사진 찍으며, 천천히 산책하던 중 눈에 쏙 들어온 팻말. 나무보다 이름이 먼저 눈에 띄어 올려다보게 됐다는.
까마귀쪽나무
제주와 남해안 일부에서만 자생하며 열매가 포도알처럼 검게 익으면 까마귀가 열매를 따먹는데
쪽 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운 이름이 있을까? 팻말에 적힌 설명을 읽어보고는 무슨 동화 속 이야기인가 싶었다. 까치들에겐 감나무에 하나씩 남겨진 단감이 있듯 까마귀들에겐 까마귀쪽나무 열매가 있었구나.
찾아보니 열매는 10월쯤 자줏빛으로 익는단다. 가을에 오면 까마귀와 나무 열매가 뽀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 괜스레 상상이 되며 미소가 지어졌다. 솔직히 나무 이름표가 없었다면 스~윽 보고 지나쳤을 테다. 이름과 그 의미를 알고 나니 달리 보이고, 가을에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여기서 하나 더!
꽝꽝나무
잎이 불에 탈 때 '꽝꽝' 소리가 난다 하여 '꽝꽝나무'라 부릅니다.
겨울에도 녹색을 유지하며 덤불처럼 자라지요. 새로운 싹이 잘 맺혀 전정을 해주면서 토피어리나 울타리로 많이 이용됩니다.
비숑 강아지 머리처럼 둥글둥글 다듬어진 나무. 이 나무야말로 도로변이나 공원을 오갈 때 종종 보여 눈에 익었던 녀석이 아니던가. 정작 이름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그 이름이 어쩐지 귀여우면서도 씩씩한 느낌이다. 잎이 불에 탈 때 꽝꽝 소리가 나서 '꽝꽝나무'라니. 불현듯 태워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기도.(하하)
이름을 알고 나니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의미까지 마음속에 담으니 정이 간다. 이름은 그런 건가 보다.
오늘은 곁에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