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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워리 Jan 25. 2022

취기어린 하루, 벨기에 브뤼셀

나의 첫 유럽여행 회상기 04




  





  편의점에 진열된 다양한 맥주를 구경한다. 수입맥주 '4캔에 만원'이 나를 유혹하지만, 딱 하나만 골라 계산했다. 이번에는 브뤼셀에서 겪었던 하루에 대해 떠올려야 하므로, 벨기에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기로 한다. 진한 향기와 부드러운 목 넘김에 기분도 좋지만, 취기가 살짝 올라야 그때의 감정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첫 유럽여행이다 보니 볼거리도 많고 유명한 대도시 위주로 일정을 짰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런던, 파리, 로마... 그 사이에서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볼 게 없다고 판단되어 아예 루트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그중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굳이 하루 머무르기로 했는데, 그 까닭은 단순했다. 런던에서 유럽 대륙으로 나갈 때 해저터널을 통과하는 유로스타를 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저 터널이라니! 게다가 출국심사도 간단했고, 열차만 탑승하면 되니 공항으로 가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단축됐다. 도버 해협을 단 두 시간 만에 건너 도착한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그렇게 섬나라 영국에서 나와 처음 대륙 땅을 밟았다.

  브뤼셀 미디 역에서 나오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흐렸고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때부터 브뤼셀의 첫인상은 나에게 침울하고 고요한 도시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브뤼셀, 그랑플라스




  벨기에에서 보고 싶었던 건 딱 세 가지였다. 그랑플라스, 오줌싸개(소년) 동상, 오줌싸개 소녀 동상. (오줌싸개 개 동상도 있다.) 브뤼셀은 도시가 정말 작아서 대충 걷다 보면 사람이 좀 붐빈다 싶은 곳에 오줌싸개 동상이 등장한다. 런던에서는 구글맵을 항상 보면서 다녔지만, 이곳에서만큼은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본 오줌싸개 동상은 정말 별 거 없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안 했다. 도대체 왜 오줌싸개가 이 도시의 자랑거리인지 의아했다. 길거리에서 고디바 초콜릿을 묻힌 딸기를 팔길래 하나 사서 먹었다. 어쨌거나 벨기에 초콜릿 '고디바'의 본고장에 왔으니.


  다음은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Grand place라는 단어 그대로 '큰 장소'라는 뜻의 광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기대를 많이 했는데, 실제로 와 보니 정말이었다. 입을 벌리고 감탄사만 연발했다. 온전히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구나.

  

  광장 한복판에 한참을 앉아서 바라보았다. 유럽이 좋았던 이유가 바로 이런 광장들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그 광장 주변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저마다의 이야기와 역사가 들려오는 듯했다. 




브뤼셀, 그랑플라스




  이제 오줌싸개 소녀 동상을 찾기 위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짐을 풀고 시내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또 다음날 떠날 짐을 싸야 했기에 서둘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브뤼셀에서의 반나절 여행은 그렇게 바쁘고, 싱겁게 끝났을 거였다.


  소녀는 좀 외진 곳에 숨어있었다. 구글맵을 켜 찾아간 골목에서 오줌싸개 소녀를 막 발견했다. 역시 별거 없군, 하는 순간 하늘에서 빗방울이 똑 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브뤼셀에서 보기로 했던 세 가지를 전부 다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는 것이었다. 근처 바의 야외 테이블 캐노피 아래로 뛰어가 잠시 비를 피하게 됐고, 운명처럼 또 누군가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빈센트






  거리엔 카페 겸 펍이 많았다. 처마 아래 서서 비를 피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테이블에 앉아있던 두 명 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한 명은 세네갈에서 온 흑인 남자, 한 명은 안트워프에서 온 백인 남자였다. 안트워프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벨기에의 또 다른 도시라고 했다. 나중에야 동화 <플란더스의 개>에 나오는 배경 도시, 안트베르펜인 걸 알았다.


  아무튼 서 있지 말고 같이 앉으라며 의자를 빼 주길래, 또 냉큼 앉아버리는 나였다. 다양한 사람들과 두려움 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런던에서 켄과 수다를 좀 떨어봐서 그런 건지, 영어가 술술 나왔다. 백인 남자는 같이 주문하러 가주겠다며, 내게 뭘 마실 건지 물어보았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였다. 


  "벨기에 맥주 유명하잖아. 추천 좀 해줘." 


  라고 하니, Gouden Carolus라는 흑맥주를 시켜주었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야외 테이블에 합석하게 되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맥주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세네갈에서 온 흑인이 젬베를 앞에 두고 즉흥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손으로 툭툭 치는데 그루브가 달라도 뭔가 달랐다. 뭐지, 이 분위기. 맥주는 또 엄청 진하고 맛있어서 금세 취기가 올랐다.




벨지안 흑맥주와 젬베를 치는 흑인



  참 신기한 경험이다. 별다른 대화 없이 잠자코 젬베 연주를 듣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부부가 또 갑자기 합석했다. 알 수 없는 처음 들어보는 언어를 구사하며 빈센트와 대화를 나누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무슨 언어냐 물어보니 더치(dutch)라는 네덜란드어라고 했다. 그럼 저분들 네덜란드 사람들이야? 하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고 벨기에 북부 지방에서는 더치도 쓴다고 했다. 유럽 대륙은 참 조그마한데, 나라도 많고 언어도 다른 게 흥미로웠다. 알고 보니 이 부부는 이미 다른 데서 한 잔 걸치고 온 상태로, 남편분이 오늘 생일이라며 테이블에 있던 우리한테 전부 맥주 한 잔씩 돌리고는 가 버렸다. 그렇게 신이 나서 또 흑맥주 한 병을 더 마신 나는 완전히 꽐라가 되었다.


  술 좀 깨고 커피 한 잔 더 하지 않겠냐며 빈센트는 그랑플라스에 있는 스타벅스로 나를 안내했다. 원래 한국에서도 잘 가지 않았던 카페를 해외에서 가보다니. 그렇게 라테 한 잔을 사주고는, 그랑플라스 말고도 브뤼셀엔 좋은 곳이 많다면서 같이 다니자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취한 채 와플과 감자튀김을 사서 함께 나눠 먹고, 이름 모를 골목길을 걸었다. 그는 이곳저곳 설명해주는 듯했지만, 내게 기억나는 건 따스한 햇살 그리고 몽데아흐(Mont des arts)라 불리는 예술의 언덕뿐이었다. 거긴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도 많이 찍고 구글맵에 저장도 해놨는데 참 다행이다. 언젠가 또 다시 갈 수 있을 테니까. 




몽데아흐 언덕에서 바라본 건물




  어느새 먹구름은 다 사라지고 하늘은 푸르게 개고 있었다. 흐린 하늘에 가려져 잿빛 도시처럼 보였던 브뤼셀의 건물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서서히 노을로 물드는 거리를 따라 다시 그랑플라스로 돌아갔다.

  어두워진 그랑플라스는 더 화려했다.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광장 한 바퀴를 돌고 난리를 쳤더니 빈센트가 또 한 잔 하러 가자고 했다. 도대체 오늘 술을 몇 잔을 마시는 거야? 그렇게 2차를 갔는데 아까 우리가 만났던 그 술집이었다. 본인은 이 골목이 좋다면서 여기 단골이란다. 

  



잎담배를 말아 피던 빈센트




  빈센트와 그 거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일렉 음악을 만드는 안트베르펜의 대학생이었다. 스마트폰이 아닌 2G 폰을 썼고 이어폰 대신 헤드폰을 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내게 들려주었는데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라 듣고 흘려버렸다. 이름이 빈센트 빈센트라, 어떻게 성과 이름이 같을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페이스북 하냐고 물어봤는데 아이디가 기억이 나질 않는단다. 그것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페이스북 아이디를 알려주며 나중에 꼭 친구 요청을 하라고 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지금도 그 거리에 가면 왠지 빈센트가 테이블에 앉아 흥얼거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 것 같다. 헤드폰을 목에 걸고, 아니 이제는 에어팟을 귀에 꼽고 있으려나. 그가 작곡한 일렉 음악, 지금 다시 듣는다면 좋아할 자신이 있는데. 



  그렇게 브뤼셀에서의 취기어린(?) 여행은 시시하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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