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견뎌온 게 아깝지만 지금이라도 벗어나는 게 맞습니다
잘 쓰고 싶다, 라는 말은 잘 살고 싶다, 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잘 산다는 말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물리적 수치들을 무게로 재 더 무거운 쪽에 하는 말이다. 더 비싼 차, 더 높은 집값 등. 글을 잘 쓰고 싶은 것과 인생을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것의 차이는 무게의 추를 타인에게 두느냐, 자신에게 놓느냐이다. 삶은 살아가는 도중에 다른 이들의 개입이 빈번하다. 학창 시절의 성적표부터 어느 유튜버의 성공하는 글쓰기라는 제목과 썸네일까지. 그러나 글쓰기의 순간에는 키보드는 거들뿐, 결국 수많은 나만 남는다. 내 글은 오로지 수많은 나에 의해 평가되고, 지워지고, 또 쓰여진다. 내 글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나 자신과의 결승선 너머에 있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는 내 신조는 여기서 시작된다. 글감은 당연하다.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다. 내가 좋아하는 것, 끔찍이 사랑하는 무언가에 대해 쓰다 보면 거짓으로 무언가를 포장하거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상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의 가면을 쓰고 혹은 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속인다. 이를 테면, 일과 가정 모두를 완벽하게 챙기는 워킹맘이라던가(외계인과 같은 부류다), 착하면서 재밌는 남자친구(역시 해태와 같은 존재)처럼 보이고 싶다던가.
나 또한 훌륭한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코피나게 공부했던 험난한 수험생활을 넘었고 가족들은 무한한 축하를 보냈다. 인생은 이대로 성공가도를 달릴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린 9급 공무원에게 놓인 현실은 매일 야근과 커피 타기, 다른 주사님들 일 돕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 듣기, 가끔 무릎 꿇고 술을 따르는 회식으로 점철됐고 꾸중과 험담은 가득한데 수다 떨 사람 한 명 없는 직장생활 초기는 ‘훌륭한 공무원’에 대한 정의가 남다른 세계였다.
이후 나의 직장생활 중기라고 일컫는 시기에는 나름 친한 사람들도 생기고 칼퇴도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이 곳은 힘들어도 웃으며 견뎌야 하는 곳, 그게 내가 아니라 상사가 원하는 것이라도, 라는 생각이 자리 잡아 떠나지 않았다. 잘못된 인식은 점점 더 견고한 가면을 만들었고, 분명히 종이가 날라 오며 욕을 먹을 정도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도를 벗어난 직장의 어떤 일들에도 의심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몰라준다는 건, 내가 나를 버려둔다는 건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10년 차의 내가 갑자기 사무실에서 눈물을 쏟았을 때가 되어서야 뭔가 잘못됐어,라고 인지했다. 훌륭한 공무원의 길로 나아갈 힘은 이제 내게 없었다.
애초에 그 길이 원하는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두 번의 승진과 4번의 인사이동을 거친 지금에서야 여기는 내가 있을 수 없는 곳이구나, 깨달은 무지한 나를 탓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절대로 오해가 많았습니다, 하며 웃어넘기지는 않겠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구절을 직장생활에 빗대어 바꿔보면, ‘행복한 직장생활은 비슷한 이유로 다 행복하고, 불행한 직장생활은 각자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이다. 누구나에게 다 수많은 불행한 직장생활의 이유들이 있겠지만, 견디는 삶도 시도하는 삶보다 더 멋있다는 것을 이제 처절하게 알지만, 나는 그만둬야겠다. 그리고 이 불행을 미워하지 않고 싶다. 불행을 안주삼아 마신 술이 한 짝이나, 이 불행으로 나 자신이 행복해지려는 시도를 하게 된 것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알게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