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
2일 차, 첫 숙소에서 잔뜩 들고 온 투어프로그램 리플렛들을 하나하나 읽는다. 빙하 트레킹, 얼음동굴, 화산동굴, 퍼핀 관찰하기, 오로라헌팅 등… 무엇 하나 포기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하지만 투어 하나하나의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하나만 골라야 했다. 고심 끝에 결국 우리는 얼음동굴 투어를 신청했다.
안내 문자로 온 장소에 도착하니, 가이드 옆에는 큰 오프로드 차가 서있다. 예약자를 체크한 후, 차에 올라탄다. 주위를 둘러보니 미국, 유럽, 아시아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한데 모여있다.
차를 타고 험한 자갈길을 달렸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봤던 것 같은 험난하고 울퉁불퉁한 지형에 눈과 자갈이 섞여 놀이기구로도 구현할 수 없는 스릴감을 선사한다. 흑백의 쿠앤크 쿠키같이 생긴 땅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옆에는 검은 모래 산이 있다. 산에서 바람에 깎이고 떨어진 자갈들이 주기적으로 굴러 내려오는 것 같았다.
15분쯤 달렸을까. 도착한 곳에는 바퀴가 내 허리까지 올라오는 더 큰 차가 기다리고 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표지판은 커녕 딱히 길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열댓명의 성인이 끼여 탄 초대형 오프로드 버스가 미지의 땅을 개척하며 달리니 따라오는 동반자가 있다. 극심한 멀미. 고통을 참고 달리다 드디어 내리나 싶더니 또 걸어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우리...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는 거지?'
혹여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땅만 보고 걷는다. 얼음이 나오면 발가락에 힘을 꽉 쥔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같은 물줄기도 건넌다. 가이드가 이 물은 빙하가 녹아 내려오는 깨끗한 물이라고 떠먹는 시범도 보인다. 남편이 마셔보더니 ‘삼다수 맛'이라고. 음... 맛있다는 거겠지? 물이 말 그대로 얼음장이다. 아무 냄새 안 나는 깨끗한 맛이다. 마트에서 팔던 Glacier water가 이곳에서 온 물일까? 텀블러를 가득 채워서 물 한 병을 만들었다.
20여분을 걸어 도착한 얼음동굴은 매우 어두웠다. 헤드랜턴을 준 이유가 있었다. 간신히 햇빛이 드는 곳은 새파란 얼음이 영롱하게 빛난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빛이 거의 안 드는 깊숙한 동굴까지 들어갔을 때, 가이드가 헤드랜턴 빛을 꺼보라고 한다. 처음엔 아무것도 안 보이더니 이내 빙하의 파란빛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화산이 폭발한 해에는 화산재가 쌓여서 검은 줄무늬를 새기면서 얼어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차로 달리고 발로 걸어서 다다른 얼음동굴과 그 땅 자체가 커다란 빙하라고 한다. 매년 움직이기 때문에 위치가 수시로 변하고, 매년 찾으러 다닌다고.
얼음동굴에서 사진도 찍고, 다시 멀미 나는 태초의 땅을 달려 미팅포인트로 돌아오니 3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2시, 곧 해가 질 시간. 투어 프로그램을 하나 더 할 시간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빙하 트레킹에 대한 미련이 떠나지 않았다. 빙하에 생겼다는 얼음동굴을 보고 왔지만 나는 사진에서만 보던 그 얼음 덩어리, 빙하를 보고 싶었다.
혹시나 하고 ‘가이드 없이 빙하트레킹’을 검색해 보았다. 깊은 빙하의 틈, 크레바스에 빠지면 아무도 못 찾는다는 글이 많았다. 그래도 조심하면 괜찮지 않을까..? 무모한 도전 정신이 잠시 콩알처럼 비집고 나왔다. 가끔 빙하들 위로 헬리콥터가 순찰을 하는데 혹시나 조난당한 여행객이 있을까 하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미끄러져서 크레바스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니, 발 밑의 바닥이 사라지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 든다. 빠르게 빙하 트레킹은 포기했다. 빙하를 가까이서라도 보고 싶어 가장 유명한 요쿨살론 빙하 호수를 찾아갔다. 내가 10년 전에 읽었던 아이슬란드 에세이, 그 안에 있던 요쿨살론의 모습이랑은 조금 달랐다. 웅장하다기보다는 작고, 덩어리라기보다는 조각 나 있는 모습이다. 매년 조금씩 녹고 있다는 빙하호수는 언젠가는 영영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왠지 강한 바람도, 눈도 비도 없었다. 잔잔한 물결이 이는 얼음호수에 떠 있는 빙하는 천천히,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빙하가 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이 빙하가 조용히 녹는다는 것은 지구 어딘가에서는 유례없는 폭염 또는 추위로 고생하고,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을 다 잃어버리고, 강한 태풍으로 삶의 터전을 잃는다는 것을 뜻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얼음호수의 고요함과 기후재난의 파괴력은 너무나도 상반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그 변화는 소리소문 없이, 예기치 않게 찾아와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자연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 오감과는 별개로 이루어진다. 도시에서 자라온 나는 채식을 하기 전까지는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서, 풍부한 맛의 스펙트럼을 이미 잃어버린 채 살고 있었다. 조미료가 없는 음식은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조미료가 있는 음식이 불편하다. 농사를 짓기 전까지는 자연과의 교감이랄 것이 없었다. 아무 풀이나 만지면 풀독이 오를 것 같고, 벌레에 물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지의 자연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과 멀리 살면서 '영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종교로서의 영성이 아니라, ‘의식의 확장’으로서의 영성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수 세기 전에 이미 자연의 이치와 순환의 고리를 이해하고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흙을 만질 때 느껴지는 만족감은 사실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흙을 파서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자라서 싹을 틔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한참을 쪼그려 앉아서 구경했다. 뭐가 그렇게 신기했을까. 생명의 아름다움이다. 이 씨앗을 키웠을 땅 속의 미생물과 벌레들에게 감사한 순간이었다. 영화 ‘아바타’에서는 나무가 하나의 신과 같은 역할이다. 생명력 그 자체이고, 모든 것을 포용해 준다. 현실의 나무와 풀, 벌레들 또한 생명력 그 자체이다. 죽음이 곧 사라짐을 뜻하지 않는다. 순환 속에서 죽음은 곧 생명이다. 기계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새 이 순환의 고리에서 나왔고, 자연을 대상화하기 시작했다. 생명력이 사라져 버린 순간이다.
이제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옛 전통들에 대한 이성적인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은 옛 선조들이 이미 알고 있던, 오감을 넘어 영성으로 느끼고 있던 세상의 이치들이 현대인에게 와선 머리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나 또한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과학자들의 호소를 통해 ‘이해’했기 때문에 빙하 호수의 고요함이 단순히 평온한 고요함으로 보이지만은 않는 것 같다.
요쿨살론 빙하호수는 나에게 말했다. 이 땅이 많이 병들어있다고.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판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린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 인디언 연설문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