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대에 던져진 구석기인

새로 쓰는 단어, '도전'

by 고요

'도전'이라는 단어는 나와는 가장 거리가 먼 단어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밀접한 단어이기도 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세상살이를 하는 것이 늘 겁이 난다. 무섭다. 마치 나 혼자 구석기시대에 살고 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현대 사회에 등장한 사람 같다. 현재에 적응을 못하고 헤매는 사람 같다.


전업주부 십여 년은 지하철을 타는 것조차도 도전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군가에게는 자동화된 일상이 구석기인이 된 사람에게는 급진한 시도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을 탄지 근 십 년이 넘은 것 같다. 차 운전도 못하고 택시도 못 타고 대중교통이 없어도 그럭저럭 살만한, 자급자족 가능한 섬 같은 신도시를 벗어나 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지하철 역을 통과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신용카드 세 개 중 두 개는 사용불가 카드였다. 마음이 다급해질 무렵, 다행히 하나가 사용 가능했다. 카드를 고이 쥐고 안으로 들어간다. 꿀꺽. 긴장한 마음에 침을 크게 한번 삼킨다. 까딱 잘못하니 발이 이미 오래전에 체화되어 걸어가게끔 설계된 채, 5호선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 깜짝 놀라 멈춰 선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다섯 번쯤 살핀 후에 방향을 중얼중얼 되뇌며 3호선 방향으로 올바른 지하철을 탔다. 자리에 앉아 내릴 역을 센다. 하나, 두울, 세엣, 넷. 목적지 역에서 내리려고 하자, 이내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어르신들에 밀려 두 발 주춤하다 역에서 못 내릴 뻔하던 것을 겨우 내린다.


예전 같으면 '내리고 타는 것이 우선인데 어르신들은 뭐가 그리 급할까.' 하며 속으로 불만을 표했을 터. 이만치 나이가 들고 보니 그들이 살아온 시대가 보인다. 전쟁을 겪은 세대. 이 열차를 놓치면 피난길에서 낙오될지 모른다는 시절의 기억이 뼛속까지 묻어있는 것이겠지. 총알도 불꽃도 없는 현재에도 한 사람의 과거는 온몸을 휘감고, 차 문이 열릴 때마다 지금 들어가지 못하면 영영 문이 닫힐 것이라는 생각이 거대한 파도처럼 휩쓸고 올 터. 그들의 한걸음에 기꺼이 두 걸음 뒷걸음질한다. 뒷걸음질한다 하여, 설령 역을 놓친다 하여 내가 큰일 날 것은 없으니까. 내가 살아온 시절에서 누리는 여유를 베풀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 순간 나는 핸드폰으로 내내 역을 세고 방향을 되뇌던 한심한 인간에서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된다. 마음이 조금 펴진다. 드디어 역을 나와 출구를 찾는다. 어마 무시한 계단이 눈앞에 펼쳐진다. 예전에 '계단만 보면 한숨이 나오시나요? '라는 문구와 함께 관절 병원 무릎 수술 등의 광고가 있었다. 광고를 보고 까르르 웃어대며 세월을 먹을 미래의 나를 얕잡아본 젊은 시절의 패기가 떠오른다. 긴긴 계단 앞에 한숨 한번 길게 내쉰 후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른다. 이런 기분이구나. 광고 속 노인의 부여잡은 허리와 긴 한숨이. 젊은 날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장착했구나, 나는. 이제.


긴 계단 끝 찾아갈 장소를 위해 네이버 지도를 켠다. GPS가 되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지도맹이어서 늘 동서남북을 거꾸로 들고 헤매던 내게 편리한 문명 한편을 이용할 수 있어 기쁜 마음으로 약속 장소를 찾는다. 스마트 페이라는 기능을 통해 주문을 하고 카카오톡으로 송금을 하는 신문명을 접한다. 모든 것이 새롭다. 척척 해내는 친구들을 보며 절로 '멋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 순간 J언니 생각이 났다. 대학원 시절, 친했던 언니다. 당시 마흔이 넘고 둘째가 아홉 살이었던 언니는 수강신청부터 리포트까지 컴퓨터를 사용하는 일에 있어 내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도와줄 수 있어 기쁘면서도 솔직한 마음으로 조금은 귀찮기도 했다. 어느 날 언니는 내게 말했다.

"고마워. 사실 매번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운데, 정말 할 줄을 몰라 어쩔 수가 없구나."


'왜 이 쉬운 것도 어렵지?' 하던 의문은 그 나이가 되고 그만치 키운 아이가 생기고 나서야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 아기를 낳고 경력이 단절되고 오랜 시간 만나온 사람은 아기와 가족으로 한정된 삶, 꿈이 있어 도전하고 싶은 들, 도전 자체가 도전이 되는 전업주부의 틀. 그 틀을 깨고 나와 부딪히며 겪는 모든 일은 도전이 아니고야 배길 수 없었다.

아주 단순한 컴퓨터 사용부터, 아주 복잡한 프로그램의 활용까지. 가르쳐주고말고 할 것도 없을 것 같은 지하철 타기부터 밥을 먹기 위한 스마트 주문까지. 오랜 시간 육아가 전부였던 사람이 다시 밟는 땅에 서는 한 걸음은 그러했다. 그 두려움은 차마 말하기 수치스럽고,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차마 내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고,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현대에 던져진 구석기인이라고. 지금 다시 차근차근 적응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에게도 꿈이 있다고. 다만, 그 꿈을 펼치기에는 이 세계가 너무나 크고 무섭다고. 그래서 한 발을 내딛기가 힘들다고. 그런 사람도 존재한다고. 한 발 한 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도, 남들이 한발 치고 들어오면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는 사람도 모두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도전을 하며 숨을 쉬고 있다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고백을 한다.


4.jpg


이전 04화결국은 혼자 건너야 하는 밤의 길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