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혼자 건너야 하는 밤의 길목에서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편히 자렴

by 고요


머리만 갖다 대면 어디서든 잠을 자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나에게는 밤이 늘 길었으니까. 잠을 자기 위해 채비를 하고 누우면 온갖 무서운 이야기, 잡념, 오래 묵힌 고민까지 튀어나와 잠으로 가는 입구를 막아 대곤 했다. 슬그머니 엄마 옆에 가서 잠을 청해 보아도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는 도리어 새로운 고민이 출몰했다.

'나보다 엄마가 먼저 잠이 들면 어쩌지.'

나에게도 한 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수유를 하느라 수시로 깨야 했다. 그 고비가 끝나니 한 아이가 자면 다른 아이가 꿈속에서 꽥! 소리를 지르며 깼고, 아이를 다시 얼러 재우고 나면 아까 아이가 깨어 말했다.

"쉬 마려!"

‘아! 제발 잠 좀 자고 싶다.’

간절한 바람은 꿈속에서도 이어진다.


둘째 아이는 매일 같이 하는 레퍼토리를 질리지도 않는지 읊어댄다.

"엄마, 괴물이 나 잡아가면 어떡하지?"

"엄마, 자는 동안 박쥐가 우리 집에 들어오면 어떡하지?"

"엄마, 혹시 불이 나면 어떡하지?"

어느 날은 이런 레퍼토리이다.

"엄마, 미국은 좋겠다. 지금이 낮이잖아."

"엄마, 저기 저 집은 좋겠다. 아직 안 자잖아. 불이 켜져 있네.”

또 어느 날은 이런 레퍼토리!

"엄마, 이게 무슨 소리야?"

"응. 이건 냉장고 소리야. 냉장고는 밤이라고 꺼 놓으면 안 돼서, 전기 돌아가는 소리란다."

"엄마, 이건 무슨 소리야? 무서워."

"응 이건 윗집에서 걸어 다니는 소리인가 봐. 괜찮아."


신기하게도, 어린 시절 내가 갖고 있던 그 똑같은 레퍼토리가 둘째에게서 반복이 된다. 거의 매일 밤 몇 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된다. 가끔은 꿈을 꾸어 소리도 지르고, 엉엉 울기도 하며 일어나는 작은아이를 안아 달래고 어르고 안아주며 또다시 어린 시절의 나와 다시 만난다.

유독 작은 감각에도 민감했던 나는 밤이 주는 어두움과 고요함이 끔찍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피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발악을 하다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면 꿈을 꾼다. 형형색색의 꿈 안에서 유독 빨간 피만은 끈적하게 그려져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다. 지어낸 이야기라 굳게 믿었던 귀신들은 꿈 안에서 완벽한 형태를 가진 생명체로 탄생하여 목을 조른다. “꽥!” 소리를 지르며 식은땀을 흘리고 일어나 안방 문 앞에 선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 꿈이라지만, 꿈을 깨도 다른 감각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귓가에서 들리던 선명한 귀신의 소리를 애써 도리질 쳐 없앤다. 어디선가 나는 것 같은 피의 냄새를 애써 지운다.


“엄마, 꿈이 무서워.”

조심스레 이 말을 하고 안방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무서워서 그래, 엄마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오늘도 또 무서운 꿈을 꾸었어,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어줘, 제발…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며 눈물로 바닥이 울렁이며 흐려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너는 왜 밤만 되면 이러니?”

문이 열린다. 피곤하고 한심한 말을 들으며 마음이 무너진다. 한 번이라도 안 깨고 잘 자고 싶은데, 나에게도 밤이 무섭지 않았으면 바랬는데, 나는 결코 밤을 피할 수 없었다. 다들 잘만 자는 잠을 못 자는 나 자신이 분명 어딘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 무서워! 엄마, 잠이 안 와."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가 말한다. 그러고 이어 묻는다.

"엄마, 잠이 안 올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아?".

"어떻게 하면 되는데?"

"아빠가 얘기해줬는데, 잠이 안 오면 눈을 감고 빵까(애착 배게)를 만지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하고 누우래." 그리고는 덧붙인다.

"그리고 엄마, 거기에 나는 엄마 냄새가 있으면 더 잠을 잘 잘 거 같아. " 아이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누웠다. 나에게서 나는 다정한 엄마 냄새가 아이의 고민거리와 서운한 하루를 씻어줄 수만 있다면....


둘째 아이는 하루에 담아놓은 많은 서운함을 유독 자기 전에 한 번씩 떠올리고는 한바탕 훌쩍이다 잠이 든다. 몸이 유독 피곤한 날이면 그런 징얼거림과 훌쩍임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아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면서도 이내 마음이 일그러져 애써 피하고 싶다.

"엄마가 엄마를 백까지 세줄께. 우리 호는 엄마가 여기도 저기도 많아서 잠을 잘 잘 거야. 엄마 하나, 엄마 둘, 엄마 셋...."

아이는 엄마 백이십에서 잠이 들었다. 쌔근쌔근 고요한 숨소리가 들린다. 잠으로 가는 길목에서 아이에게 다정한 인사를 해주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 온다. 고된 하루를 마치며 마지막까지 끌어낼 밤의 배웅을 꽤나 만족스럽게 해낸 나 자신에게 "잘했다."라고 칭찬해준다. 그렇게, 그 시절의 어린 나에게도 이야기해준다.

"걱정 마. 엄마가 눈 크게 뜨고 옆에서 지키고 있을게.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자.!"

물론, 아이와 나는 다르겠지만, 유독 나를 많이 닮은 아이! 네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 시절, 어린 나는 ‘왜 또 그래! 얼른 가서 자!’라는 냉랭한 핀잔보다, 엄마가 지켜 줄 테니 아무 걱정 마라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나 보다. 무서운 꿈에 비명을 지르고 공포에 떨며 한밤중에 깨서 달려간 부모님 방 앞, 한 번의 따뜻한 포옹과 다정한 밤 인사 대신 받은 핀잔에 한없이 작아지던 날, 눈물로 얼룩진 배게를 끌어안은 채 잠이 오길 간절히 바랬던 날들. 나는 그저 엄마 품에 오롯이 안겨, 내가 안길 곳이 있고 보호받을 곳이 있다는 안심을 얻고 싶었나 보다. 비록, 이제는 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잠자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도깨비도 귀신도 심지어 죽음도 그다지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이지만, 아이를 통해 다시 또 그 시절의 나에게, 그 한마디를 기어이 해준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편히 자렴. 아무 걱정 말고..."


함께 자리에 눕더라도, 결국에는 혼자 건너가야 하는 밤의 여정! 그 여정을 통과해야만 내일이 온다. 내게는 한없이 길었던 밤을 이제는 아이가 건너가야 한다. 철저히 홀로 아이가 건너가는 밤의 길목은 그 시절 나의 것처럼 휘몰아치는 어둠이 아닌 고요하고 편안한 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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