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다시 쓰는 데미안

알을 깨부순 신

by 고요

책이 사람을 바꾼다고?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해.

뭐? 그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할 소리냐고?


맞아. 나는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이야. 하지만 글쓴이와 글 읽는 이의 '행위'를 통해 연결될 때에만 책이 의미가 있다고 믿을 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저 텍스트, 그 자체에 머물러 있을 뿐. 그 텍스트를 관통해야만 책 읽기의 완성이 된다고 생각해. 그것이 투명하고 아름답고 따뜻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난폭하고 찢기고 무거워 짓눌릴 수도 있지.


책은 도구일 뿐. 책이 사람을 바꾸려면 그 사람 안에서 책이 머물만한 시간이 필요해. 실제로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들여 독서를 할 때,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른 세계를 엿볼 코딱지만큼의 기회를 갖지. 그리고 빌어먹을 그 코딱지만큼의 기회는 결국 자신이 한 직접적 경험과 또 자신의 사랑의 크기와 맞닿아 있어. 사랑이 없이는 결국,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백날 책 읽어봐? 마음속에 가득한 우리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소용없을 걸. 나는 책 속에서 행복을 배운 적이 없어. 나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행복을 배웠지. 앞으로도 그래. 나는 책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볼 거야. 나 자신을, 내 삶을 버리고 몽상을 들여놓을 거야. 뜨거운 불길을 들여놓는 심장을 둘 거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처음 읽은 건 중학생 때야. 근데, 다들 엄청나다는 그 소설에 불만을 품은 아이는 나 혼자일 거야. 모르지 뭐. 말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런 아이가 또 있었는지도. 나는 조용하고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았으니까.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는 바로 이거야. 책은 읽지 않아도 모두 한 번쯤 들어봤을 그 문구.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데미안, p123>


사람들은 종종 잊나 봐.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들을 살아보는 것이 더럽게 어려운 인간도 있다는 걸 말이야. 알에서 나오면 '용기 있다.'며 칭찬을 받고 환호하지. 그런데 말이야, 알 속에 있으면 왜? 왜 안되는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비겁한 것도 아닌데, 그저 알 속에 있고 싶다는데 왜 가만히 두질 않나 몰라.


빌어먹을!

용기를 강요하는 세상.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되는 세상. 겸손을 미덕으로 쳐주지 않는 세상. 할 수 있는 것들을 굳이 기어코 드러내야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세상, 도전에 환호하는 세상이 나는 싫었어.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은 내뱉을 수 없는 금기사항. 어디서 이딴 말을 해. 사춘기 한번 없이 조용히 착하게 살아온 시절인데....


그렇게 사십 대가 되고, 이제야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왜 알을 등장시켰는지 알게 되었어. 책에서 배운 것은 아니야. 나의 삶에서 나의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들었고, 그것은 온전한 나의 소리였지. 어쩌면 그 책을 이해하기까지 이만 치의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몰라.

만약, 책이 필요하다면 나는 책을 다시 쓸 거야. 헤르만 헤세 표 버전의 데미안이 아니라 나만의 데미안으로. 싹 다 각색할 거야. 그리고, 그 버전은 이렇게 될 거야.


아! 헤세를 모욕하려고 쓴 글은 아니야. 다만, 오랜 시간 내게 의문이었던 그 책을 나의 버전으로 바꾼 것일 뿐. ^^ 한번 들어보겠니? 제목은 말이지...



제목: 중년에 다시 쓰는 나만의 데미안:

‘알을 깨부순 신’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알은 세계고,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야 했다. 거대한 새는 발버둥 칠 뿐, 알 껍질이 두꺼워 실금만 길어질 뿐, 여전히 알은 깨지지 않았다. 시간이 길어지자, 거대한 새는 안온한 알 속이 좋았다. 편하고 따뜻한 곳. 그곳에서는 미쳐 날뛰는 그 어떤 것도 피해 있을 수 있었다. 안온한 알 속에 있던 새는 생각했다.

'굳이 이 알을 깨고 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알 속에는 불가항력적인 외부 요소들이 없었다. 그곳은 새가 쉬이 할 수 있는 익숙하고 단순한 세계들이 반복되고 있었고, 새는 그곳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알은 던져졌다. 신은 거대한 새가 들어있는 단단한 알을 집어 들고는 높은 바위를 향해 던져버렸다. 실금은 알은 단번에 빠지직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졌다.

철퍼덕!

미처 부화되지 못한 거대한 새가 생기다 만 채로 철퍽철퍽 자신의 알 속 세상의 일부를 밟아 대며 소리쳤다.

"내가 나간다고 했잖아. 그걸 못 기다려 왜! 씨발! 그걸 왜 못 기다리냐고!"


자신이 안온하다 생각한 세상을 감싸던 껍질을 자신의 발로 짓밟으며 피비린내 나도록 껍질에 베이고 새로운 세상에 덴다. 거대한 새는 미쳐 날뛴다.

"나 같은 새 하나 그냥 알 속에 들어있다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누가 던져 깨부순 거냐고!"

꽥꽥 소리치며 몸부림치던 새는 이내 곧 죽어도 그만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새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깜깜한 어둠과 무서우리만큼 고요한 정적. 바로 그때, 새는 자기 안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안간힘이 내는 진동을 느낀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피의 진한 소리를 듣는다.


자신은 알 속에 그냥 있어도 되는 새가 아니었다. 자신은 피를 보고 파멸을 보고서라도 이 세상에 나와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새였던 것이다. 새는 자신의 피가 속삭여 알려주는 소리에 드디어 귀를 기울인다.

알을 매몰차게 던져 파멸에 이르라 이른 신, 알을 강제로 깨부순 신, 그리고 깨진 반쪽의 알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새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피의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발아래에는 깨진 알의 파편이 가득하다. 선혈이 낭자한 자신을 지레 밟고 담담히 새는 걸어 나간다. 저벅저벅. 새가 지나간 자리에 그의 발자국이 선명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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