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했던 날, 들이닥친 일

위기에 대처하는 어른의 자세

by 고요

<코로나 초기 이야기>


이 날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주말이었다. 날씨가 포근하고, 미세먼지 하나 없는 일 년에 몇 안 되는 따뜻하고 맑은 겨울날이었다. 주말이긴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디를 가지 못하는 우리는 여전히 그런대로 집안에, 그리고 동네에 머물며 조심조심 지내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집 앞 광장에 나와 갓 오픈한 안경집 오픈 이벤트로 풍선아트를 만들어 주었고, 아이들은 그것을 받으려 줄을 서 있었다. 신랑에게 오늘 저녁에 먹을 부추랑 아이들이 마시고 싶다던 딸기 라테 좀 사다 달라고 심부름을 시켜놓고 풍선을 하나씩 건네들고 행복하게 집으로 가려던 찰나에 신랑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코로나가 발생해서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대."

나중에 알고 보니 신랑은 확진자 직원과 밥을 같이 먹진 않았고 자리가 그 사람의 반경 몇 미터로 가까워 회사 선제 방어 차원에서 미리 검사를 시킨 것이었다. 결론은 밀접접촉자는 아니었고 늘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으나, 혹시 모를 선제 방어. 그 상황을 알리 만무했던 나와 아이들은 무서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검사를 받으니,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안방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우리도 안방에 들어가지 못하니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고 준비하자고 이야기했다.


작은아이가 눈물이 글썽글썽하더니, 엉엉 운다. 큰 아이도 곧이어 같이 엉엉 운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다 괜찮을 거야." 토닥이며, 아이들과 함께 아빠의 방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아빠 먹으라고 간식거리며 과일을 챙겼고, 기본적인 옷가지들, 물, 읽을 책거리, 그 외 필요할 것 같은 것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 방에서 필요한 이부자리 등을 밖으로 내어왔다.


회사의 전화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작은아이는 그 좋다는 풍선을 받고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 손만 꼭 잡고 왔다. 눈물이 글썽한 그 얼굴에는 걱정과 불안이 서려있었다. 그 눈동자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는 나였지만, 여기서 내가 불안해하면 아이들이 무서울 것 같아, 힘을 내려고 안간힘을 쓸 때, 막 아홉 살이 된 첫째 아이가 여섯 살이 된 둘째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줬다.


"괜찮아. 우리가 괜찮다고 하면 진짜 괜찮은 거야. 근데, 우리가 안된다고 하면 진짜 안된대. 그러니까 우리 아빠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믿는 대로 되는 거야. 그니까, 울지 말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자. 응?"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치우고 있던 일을 멈추고 저 멀리에 둘이 마스크를 쓴 채 토닥이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때로는 아이들이 더 큰 위로를 해주고 더 큰 사랑을 해주고 더 큰 진실을 말해준다. 나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불안한 이 마음을 한편으로 밀어 넣지 못하여 정신없이 새어 나옴에, 정신을 빼앗겨 흔들렸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이야기해주고 행동했고 따뜻하게 위로해줬다. 그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첫째 아이가 아빠에게 편지를 써주자고 이야기하자, 둘째 아이가 "엄마, 도와주세요." 한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라 내 손위에 손을 얹고 연필로 아이가 불러주는 말을 썼다. 아이들이 직접 상을 차려주었다. 아빠가 먹으라고 지극히 자신들 스타일로 과자도 내어놓았다. 고사리 손으로 하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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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주는 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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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픈 게 아니라 단지 회사 사람 중 한 명이 걸려서 선제방어적인 검사를 받는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는데도, 아이들은 검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아프다고 생각하여 이런 편지를 쓰는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집의 첫 집 안에서의 1박 2일 자가격리. 아이들 아빠는 화장실이 딸린 안방에서 나오지 못한 채, 실내에서도 94 마스크를 쓴 채 생활해야 했고, 아빠가 보고 싶은 아이들은 수시로 영상통화를 해댔다.


작은아이는 아빠가 보이는데 만질 수가 없다며 울었고, 큰 아이는 우리 아빠가 빨리 안방에서 나올 수 있기만을 빌었다. 애틋하기 그지없는 광경들. 밥을 내어주고, 아빠가 밥을 가지러 잠시 방문을 열 시간에, 우리는 가장 멀리 떨어진 방에서 방문을 닫고 기다렸다가, 문을 닫았다는 문자를 받고서야 다시 나오고를 반복한 후, 드디어 음성이라는 문자가 공식적으로 왔다. 당연히 음성이겠지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식적인 문자가 나오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피를 말리며 기다렸던 그 시간 끝에 결국 모든 식구가 만세! 외치며, 신랑이 방에서 나왔다. 보건소에서도 공식적으로 일상생활을 하는데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하고, 그렇게 다시 원래의 우리 삶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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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쁨은 실로 일기 거리 감이었다. '아. 마음을 졸인다는 게 이런 거구나.' 혹시라도 모를 확진의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의 고민부터, 주변의 시선을 어떻게 하지, 나는 어른이라 견딘다지만, 어린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나 고민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코로나가 터진 작년 2월부터, 외식 한 번을 하지 않고 미용실 한 번을 가지 않고 정말 그 어떤 활동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저 개인 방역을 잘 지키며 정부 수칙을 잘 따르며 참아가며 믿어가며 잘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일만 하다가 혹시 신랑이 회사에서 걸려오는 경우에는 어떤 디펜스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워낙에 남의 시선, 남의 눈빛에 많은 신경을 쓰며 살아온 터라, 그 습관이 한 번에 바뀌지 않는다고 여전히 이런 상황에서 가장 나를 괴롭힌 걱정은 타인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가족의 소중함이 크게 다가왔다. 믿고 의지하고 함께 이겨낼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피를 말리던 그 1박 2일이, 끝나서 다행이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코로나 예외 사업장으로 지정해버린 신랑에 회사는 어쩔 수 없이, 이 코로나 시기에도 계속 재택을 할 수 없음에 스스로가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확진으로 인해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음으로, 마음이 무겁다. 이번 일로, 우리 가족이 다 함께 마음을 모아, 함께 바라던 것이 이루어짐에 대한 감사함. 그 행복함을, 그리고 우리의 이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더없이 깨달아,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기를 대처하는 나의 자세가, 얼마나 어른스러웠는지, 그 위기에서 어떻게 내가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지 정말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신랑과 예전에 대화를 했던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 속의 주인공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며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서조차도 작은 아들에게 이건 게임이라며 삶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자신이 죽으러 끌려가면서도 숨기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에 담긴다. 그렇게 아들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말을 믿고 삶의 희망을 놓지 않게 도와준 부성애를. 그리고, 그 영화 속 아버지처럼, 내가 어른이고 부모라면 위기가 와도 그냥 나 혼자일 때와 은 다르겠구나, 나의 아이들을 위해 어떤 삶의 자세로 위기를 대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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