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통근 루트는 버스->지하철이다. 요즘은 퇴근 길에 버스를 타지 않고 지하철 역부터 집까지 걸어간다. 정말 빠르게 걸으면 30분 컷, 천천히 걸으면 45분 정도 걸려 도착한다. 물론 야근을 하거나 너무 지친 날에는 버스를 타버리곤 말지만, 몸과 마음의 여유가 있는 날엔 하루 중 이 걷는 시간이 가장 기다려진다. 특히 요 며칠 비가 온 후 미세먼지도 없었던 데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여서 더욱 걷기 좋았다. 이 시간에는 하루 동안의 일도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있고 유튜브 뮤직 어플의 선곡 실력도 혼자서 맘껏 평가해볼 수 있다. 그냥 넓은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마음의 평안을 주기도 한다.
코로나 이후 걸을 때 좋은 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노래 가사를 맘껏 따라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소리는 내진 않는다. 마우팅만 할 뿐). 나는 주로 아침 일찍, 피곤할 때, 멍 때릴 때 등의 상황에서 아주 심각한 무표정을 짓곤 한다. 그러다 누가 말을 걸면 나의 본 상태로 돌아오는데, 그 전의 상태는 정말로 순도 100%의 그냥 별생각 없는, 아직 부팅되기 전 상태일 뿐이다. 벌써 수년 전 인턴 시절의 일화가 하나 생각난다. 그날 유난히 잠을 잘 못 자서 급히 출근을 하곤 그냥 졸리고 배고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 엄청 잘 챙겨주시던 선배님께서 간식을 슬쩍 밀어 넣어주시며 혹시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 있느냐, 급한 거면 조퇴해도 괜찮다고 물어봐주신 적도 있었다. 더 웃긴 건 멕이려고 한 말이 아니라 정말로 일신상의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시곤 몇 번이나 물어봐주셨다는 웃픈 일화... 눈은 세상 영혼 없지만 마스크 속으로는 내적 댄스를 유발하는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는 이 신난 입의 부조화란.
어떤 알고리즘의 작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퇴근길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느리게 걷자가 '퀵 픽'으로 올라와있었다.
채찍을 든 도깨비 같은 시뻘건 아저씨가 눈을 부라려도
아 적어도 나는 네게(니게) 뭐라 안 해 그저 잠시 앉았다가 다시 가면 돼
내일도 나는 영혼 없는 눈과 신난 입으로 느리게 걷고 있을 듯 하다.
#100일의 글쓰기 3일 차, 오늘의 구구절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