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에게
몇 년 전, 아니 불과 몇 달 전에 썼던 글만 다시 보아도 스스로 너무 민망할 때가 있다. 한 번 꽂히면 푹 빠지는 성격 탓인지, 당시 내가 너무 몰입했었다는 걸 조금 더 객관화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기가 오면 부끄러움에 그저 고개를 숙이게 된다. 거창하게 도덕적 상대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때 너무나 견고하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조금씩 깨닫고 있을 뿐이다. 내 삶으로서 증명해 보이리라고 결심했던 그 신념 조차도 기나긴 내 삶의 한 단계이자 찰나의 순간이었음을 느낀다. 물론 지금 같이 부유하는 시기를 지나 더 단단해지면 '아 옛날의 그 신념이 사실은 옳았구나' 라며 또 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찾으려 할 수도 있겠지만.
소위 말하는 싸이월드 흑역사 글이라던가 페이스북 감성글 등을 돌아보며 하는 얘기는 아니다. 20대를 겪어오며 나는 생각이 너무 말랑말랑한 사람은 되기 싫었다. 확실한 나의 주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고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 자신의 욕구와 선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거기에 지적 허영이 더해져서 인 지,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적 탐구를 지향하는 나'라는 허상의 이미지에 빠져있던 시절이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를 꿈꿔 왔기에, 나는 남들과 달라, 내 생각은 너희들보다 더 깊어라는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특히나 특수한 업무를 맡으면서 신념의 허상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해보았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의 가치관도 이렇게 바뀔 수도 있구나를 체감했다. 이렇게 나는 매 순간 매 초 변화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제 A라는 이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예전처럼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 문제의 답은 무조건 B라고 답할 수 없는 내가 되었다.
중심이 단단한 것과 포용력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아직도 이상주의자로서의 미련을 못 버린 나는, 중심이 잡혀있지만 다양함을 받아들일 줄 아는 진짜 어른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