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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Sep 26. 2023

보통의 오전

  설레는 기분으로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추석 연휴의 시작을 제주 구좌에 있는 예쁜 숙소의 캠핑장에서 시작하기로 했거든요. 1박이라서 아쉽긴 하지만 추석 연휴니 한편으로는 충분하기도 합니다. 무릎 담요를 덮고 어떤 걱정도, 생각도 없이 불멍을 할 계획입니다. 운이 좋으면 행운의 별똥별도, 신비로운 반딧불이도 만날 수 있겠지요. 큰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오로라를 찾아 캐나다로 캠핑카 여행을 떠나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시간은 채워졌는데 나머지는 여전히 '노력 구간'에 있습니다. 맞아요. 삶이 모두 계획대로 되지는 않으니까요. 행여 흰머리 할머니가 되어 아들과 오로라를 찾아 나선다고 해도 젊지 않아 아쉬운 마음보다 그저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로라 대신 불멍할 때 쓰려고 '오로라 가루'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날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1박을 쉴 생각입니다. 


  이번 달 고전 읽기 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은 전혜린 작가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입니다. 사실 잘 읽히지 않습니다. 반 쪽씩 읽어나가는 일을 일주일째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책머리에 이어령 교수의 글이 가장 인상이 깊었습니다. 

  '짧은 생애를 가득한 긴장 속에서 살기 위하여 끊임없는 욕망을 불태웠다. (......)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생인 전채린 교수도 '언니의 생은 (......) 꿈과 기쁨과 괴로움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찬 일생이었다.'라고 남겼습니다. 머리글과 1장만 읽었을 뿐인데 작가의 깊은 내면 속 그리움과 그녀만의 우울이 제 마음에도 소리 없이 건너와 마른행주가 물기를 빨아들이듯 마음 전체에 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왜, 왜 그녀는 자살을 선택했을까 더 멋지게 살아주지,라는 생각이 들어 종이 한 장을 넘기는 일이 참 무거운 책입니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글쎄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이미 지난 주말의 결심으로는 다음 고전 읽기 모임에 가서는 많이 듣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다 문득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마음을 다해 경청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반드시 한 번은 읽고 모임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너무 애쓰지 않고 말입니다. 그리고 처진 기분을 빨래집게로 빨랫줄에 매달 듯 잡아주기 위해 지난주부터 읽고 싶었던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도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6년 만에 다시 꺼냈는데, 책 속에는 제가 너무 사랑하는 문장이 있어서 몇 년 전에 책 사이에 끼워둔 네잎클로버를 찾는 기분으로 다시 읽어볼 생각입니다.


  어렸을 때는 참 끈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무언가 하나에 빠지면 그것만 생각하고 질릴 때까지 하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로 노래를 들을 때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데, 최근에 알게 된 가수는 발라드의 왕자 성시경 님입니다. 그러게요. 이제야 성시경 님의 노래를, 그리고 꿀 같은 목소리와 재치 있고 배려하는 말 센스와 멋진 요리 솜씨에 영어, 일본어 실력까지 모두 다 가진 사람 성시경 님의 매력을 알았습니다. 이런 멋진 분도 모르고 살다니, 그동안 뭐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뒤늦게 <희재>를 듣고 감탄하고, 감동받으며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희재> 말고도 참 좋은 곡들이 많아 고르고 골라 두 곡의 링크를 걸어둡니다. 마음속에 고요하게 몰려오는 커다란 감동이 필요한 순간에 들어보세요.

  [성시경 노래] 18. 사랑이 늦어서 미안해 (With.김조한) l Sung Si Kyung Music - YouTube
  And we go (And we go) - YouTube


  오전에는 무의식의 흐름대로 살며 어떤 상황을 만나고 생각을 하는지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에게 빠져있습니다. 그저 아는 사람이었는데 책 한 권을 전부 읽어냈을 때 비로소 그녀의 매력을 찾아내 그녀가 세상에 뿌려 놓은 점 하나에서 만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쌀쌀한 아침 기운에 진한 갈색의 바지와 인디핑크 스웨터를 골랐습니다. 골랐다기보다 눈앞에 보여서 입은 쪽에 더 맞긴 합니다. 스웨터는 핑크색을 지독하게 싫어해서 20대까지는 핑크색으로 된 옷은 물론 소품도 사지 않았는데, 제 돈으로 처음 산 핑크색 옷입니다. 오, 그런데 생각보다 핑크가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 후로 가끔씩 인디핑크처럼 부담스럽지 않은 핑크색 컬러의 옷과 소품을 사고는 합니다.


  귀걸이도 인디핑크의 비즈로 만든 링 귀걸이를 골랐어요. 왼쪽 귀가 비스듬하게 뚫려서 링 귀걸이를 끼우는 일은 처음 화장을 시작해서 눈썹을 그릴 때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눈썹이 한 번에 잘 그려지면 운수가 대통하듯 기분이 좋지만, 망치면 클렌징을 하고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 오늘도 한 번에 쏙 들어가 주길 바라며 끼워봅니다. 아무래도 첫 시작에서 손의 각도가 '그' 각이 아니었나 봅니다. 미로 찾기처럼 나올 구멍을 찾아 헤매지만 땀구멍만 열린 뿐입니다. 다시 귀걸이를 내려놓고 숨부터 고릅니다. 귀걸이는 아는 언니가 직접 만들어 선물로 준 귀걸이입니다. 애월에 있는 한 카페에서 선물을 받았는데 처음 본 순간 아무 생각에 없는 듯, 깊은 생각에 잠겨 비즈를 한 알씩 세며 넣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손길이 담긴 귀걸이가 오늘은 끌리는 날입니다. 실패를 잊고 처음인 양 다시 시도해 봅니다. 드디어 끼웠습니다. 오늘 스웨터와 잘 어울려 참 예쁘네요.


  외출 준비가 끝나면 습관처럼 칙칙, 향수를 뿌립니다. 3년이 넘도록 쓰는 튤립향 향수인데 향이 참 좋아요. 항상 기분을 끌어올려 줍니다. 달달 녹는 티라미수처럼요. 향수를 처음 쓴 것은 스무 살 때입니다. 아빠가 유럽 출장을 다녀오시면서 사 주신 불가리의 제품을 쓰면서 그때부터 코의 감각이 섬세해진 것 같아요. '칙'하고 뿌리면 라임향이 톡 하고 얹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린티의 향으로 퍼지는데 얼굴에도 이유 없이 미소를 짓게 됩니다. 가끔 그 향이 그리워 찾아보는데 해외 구매 대행으로 살 수는 있지만 가격이 너무, 너무나 비싸서 그리움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살면서 시간이 쌓이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수수께끼를 풀듯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고 찾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냄새에 민감하다는 것도 최근에 알아낸 사실입니다. 그래서 낯선 공간에 들어가면 여러 감각으로 그곳을 기억합니다. 글을 쓰는 데에는 이런 부분들이 장점이 될 것 같아요. 이것은 방금 떠올린 생각입니다.


  글이 쓰고 싶어 앉았지만 요즘은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가을이 되니 평소의 감정이 (대체적으로) 낙엽처럼 가볍게 가라앉기도 하고 유쾌하게 쓰고 싶은 에세이의 소재가 시들고 있기도 합니다. 자꾸 소설이 쓰고 싶지만 고작 아침 시간 30분을 이용해 글 한 편을 쓰는 요즘은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자고로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은 엉덩이 힘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이 고민하고 쓰고 고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산문시도 잘 쓸 것 같다고 말해서 이 부분도 흔들리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글에 대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지만 이것도 어딘가로 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찾아 헤매보려고 합니다. 


  아이의 도서관 수업을 기다리다 들어간 카페에서 만난 아주 예쁜 풍경을 함께 나누며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이야기를 접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관심은 책 밖에 @무지개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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