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적 어린이 찬양
나는 소아과 의사고, 어린이날에는 어린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 보다.
아니, 그보다는 며칠 전 대화를 나누다가 "모든 사람은 자기가 인식하는 만큼의 세상을 가졌어.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지."라고 얘기했을 때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다.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다. 최초의 기억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못해도 출생 후 2-3년 후부터다. 출생 직후의 1년은 무수히 많은 에피소드가 있을 때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아무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출생부터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생 자체에 선과 악을 논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경이롭고 아름답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것이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었을 때를 경험해 본다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단순히 생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수히 많은 가능성과 발전과 발달과 그렇게 발생하는 수많은 사랑과 기쁨이 흘러나오게 될 가능성을 주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그래서 한 아이의 탄생은 경이롭고, 아름답고, 숭고하다.
인간은 감각하는 기계다. 감각하는 기계는 최초의 감각 이외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알지 못하며, 감각으로부터 알아가게 되고, 알아감이 쌓여 지식이 되고 지식들이 쌓여 감정이 생긴다. 외부의 감각은 반응을 낳고 반응은 감각 기계마다 다르며, 감각의 종류마다 반응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감각이 들어가기 전까지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감각과 경험이 존재하기 이전의 반응은 알 수 없다. 반응은 쌓여서 경험을 만들고 경험은 쌓여서 기억을 만들고 기억은 쌓여서 나를 만든다.
감각은 나를 형성하는 경험이다.
다시 말하지만, 감각하는 기계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였다. 예민하게 반응할 것인지, 둔하게 반응할 것인지. 이 세상이 두렵다고 느낄 것인지, 한없이 온화하다고 느낄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주어지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온전히 감각하는 기계인 인간, 자신의 몫이다.
언젠가, 이렇게 말하는 보호자를 만났다.
"저는 성악설을 믿어요. 우리 애는 정말 못된 거 같거든요. 저를 고생시키려고 태어난 것 같아요. "
사람의 본질에 선과 악은 없다고 믿는다. 위에 말했던 모든 것들, 우리가 했던 모든 것들이 -출생을 포함해서-우리가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포함될 수 없다. 의지가 없으므로 내 행위는 선하거나 악하기 힘들다.
받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주어진 객관적 상황에 대해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논란이 일 때 후설은 이렇게 말했다.
"가치 판단 유보" -에포케
모든 사물은 당신의 존재로 이미 존재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당신의 가치를 배제하고 사물을 관찰할 수 있을 때까지 대상에 대한 판단을 미루도록 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한다(es gibt, it gives, there is)"는 것은 후설의"주어짐"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로 정신은 신체와 분리되어 마치 우리의 몸은 거룩하지 않은 것처럼 오랫동안 내 쳐 저 왔다. 하지만 우리의 몸을 통해 마음이 형성된다. 퐁티는 우리가 곧 몸이라고 했다. 의사로서, 사람으로서, 심리학도로서
마음은 몸과 분리될 수었다. 최근 공부하고 있는 뇌과학도 인간 발달학도 모두 말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몸과 분리될 수 없다고.
인간이 세포 분화를 시작한 시점부터, 뉴런이 만들어지고 연결되고 그것들이 분화되어 기능을 만들어가가고 풍성한 연결을 만들어가는 그 모든 경험들이 풍성해졌다가 다시 필요 없는 뉴런의 연결들을 가지치기를 통해 정리하고 경험들을 연결하고 경험들을 통해 예측하고 그 통계들을 통해 필요 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가는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완성해 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신체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해 나간다.
내가 알아가는 만큼 세상이 존재한다. 이해하는 만큼의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발달장애와 지연을 공부하는 내가 아이들에게 열어주고 싶은 세상은 왜곡되지 않은, 소통할 수 있는 그래서 외롭지 않은 세상이다.
감각조절이 자유롭지 않은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세상은 답답하거나 무섭지 않은 그래서 풍성한, 그리고 너의 가능성을 열어줄 그런 세상이다.
아직 내 감정과 감각의 이름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소통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열어주고 싶은 세상은 감정과 감각에 풍성한 색과 이름이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나의 아픔, 즐거움,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호기심을 나누고, 미래와 꿈을 나누고, 두려움과 아픔을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이다.
아직 나의 두려움에 단어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단어를 주고, 호소할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나의 일이다.
그래서 모두 각자의 넓고 아름다운 우주의 주인이 되어야지.
그러니 당신, 언젠가는 아주 작은 우주의 주인이었을 어린이였던 당신마저도, 오늘은 주인공 이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 었던, 어린이인 우주들은 소중하다.
하나의 사람은 자신이 감각하는 만큼, 자신이 이해하고 인식하는 만큼, 그리고 이후로 상호작용하는 만큼의 우주를 갖는다.
감각은 자신이 선택하는 건 아니지만,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는 부분은 세상의 몫이다.
이후는 어른들의 사정이란 뜻이다.
나는 어른들의 사정을 맡은 사람으로서, 각자의 우주가 더 넓고 맑고 풍부해지길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유니버스들에게 사랑을 전하며
2024년 어린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