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각보자기 Jan 17. 2022

나를 지키는 출근길

“테이크아웃 잔에 드릴까요?”

이 질문을 듣는 2초간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일회용품 사용을 지양해야 하는 건 맞지만, 종이컵에 음료를 받는 모두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카페에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버젓이 빈손을 흔들며 온 나다. 아침마다 찬장 문을 열어 색깔별로 크기별로 다양한 텀블러를 보고 손을 뻗었다가 이내 주춤한다. 오늘 출근 가방에는 텀블러가 안 들어갈 것 같아, 게다가 이미 가방도 무겁잖아. 에이, 대신 오늘은 카페 안 가면 되지!

부지런하게 쓰일 줄 알았던 텀블러들의 실망한 얼굴을 외면하고 출근하는 나.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아침의 다짐과 다르게 이런저런 상황과 이유로 카페에 가게 된다. 어쩌다 텀블러를 지참한 날도 있지만 대게는 빈손으로 간다.


한 달에 한 번 마감을 할 때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카페에 갔다. 카페인을 주입할수록 뇌는 각성했고, 일회용품은 금세 사무실 천장에 닿을 듯 쌓였다.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탑을 보는 마음은 심란했다. 꼭대기에 내가 마신 일회용 컵을 올릴라 치면 더욱 그랬다. 돌탑을 얹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음엔 꼭 텀블러를 챙기겠습니다’ 다짐했다.

하지만 잘 지키지 못했다. 출근이 급하니까, 마감이 급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급할 때 합리화했다. 지금 뭣이 중헌디? 당연히 일이 중요하지, 환경이 대수인가? 환경에 관한 일도 잘하면 좋겠지만, 나는 회사 일을 잘하기에도 힘에 부치는 직장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퇴사를 하고 쉬는 얼마간은 급할 것이 없었다. 출근하지 않으니 억지로 깨어날 필요도 없었다.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사실 나는 커피 맛을 잘 몰랐다. 다크로스팅 커피는 담배꽁초의 맛, 산미가 좋다는 커피는 썩은 고구마의 맛이었다. 그저 커피가 생명수라는 직장인의 룰에 공감했을 뿐이다.

졸리면 언제든 잘 수 있는 집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기후위기나 미니멀리즘 관련 책을 읽었다. 아침마다 빗자루를 들고 집을 쓸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나의 공간에는 불필요한 정보도, 관계도, 리액션도 없었다. 평온한 날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동네에서 장을 보고, 조리는 간소하게, 음식물 쓰레기는 최소화. 꼭 필요한 물건은 중고 거래로 구입하고, 덜 쓰고 덜 소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분리수거도 철저히 했다. 평소에는 귀찮아서 하지 않았던 엄격한 기준으로, 그러니까 세제 리필에서 플라스틱 캡 부분을 가위로 오려내 복합재질을 따로 버리는 정도로 말이다. 어떤 날은 라디오를 들으며 손바느질을 하고, 또 어떤 날은 나무 조리도구에 들기름을 먹였다.

잊고 지냈던 삶의 모토가 떠올랐다. 소박한 삶, 천천히 걷는 삶, 덜 소비하는 삶 같은 말들. 나는 보통 그런 말들에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바쁜 직장인의 세계에선 어쩐지 궁상맞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사치스러워 보였다고 해야 할까. 회사 생활은 빠릿빠릿하게, 효율적으로, 조직적으로, 남들과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눈치껏 자주 숨겼다.


고려할 항목이 나밖에 없는 백수의 하루는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몇 개월 더 집에 있었다면 나는 일본의 미니멀리스트 ‘이나가키 에미코’처럼 냉장고를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 재취업을 했다. 삶의 모토는 금세 흐려졌다. 매일 도시락을 싸야 하는 직장인에게 냉장고 없는 삶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에미코 여사의 미니멀리즘도 퇴사 후에 빛을 발했다고!

출근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가는 지각이다. 해야 할 업무가 태산인데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묻고 앉았다면 근무 태만이다. 직장인에게는 직장인의 모토가 있으니까. 빠릿빠릿하게, 효율적으로, 조직적으로, 남들과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그렇게 삶의 모토를 직장에 위탁한 어느 날, 맛도 모를 커피를 습관적으로 마시고, 문득 또 텀블러 없이 카페에 가고 있는 나를 자각했을 때, 스트레스 때문에 괜한 물건을 사거나 폭식을 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을 때, 왜 회사에 다니면서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의 나로 살기 힘든가에 대해 골몰하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사는 건 솔직히 월급보다 덜 중요한 일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지난 일주일 동안 '앞으로는 직장인의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하루가 아니라, 내 자유의지에 따라 판단하고 실천하며 내 인생 살자!'라고 쓰고 다듬었다. 글 제목은 ‘나를 지키는 출근길’이었다.


-

그 글을 예정대로 발행하지 못했다. 자원순환으로 대표되는 내 삶의 모토를 좀 더 실천하자는 단순한 내용인데 어딘지 내키지 않았다. 글은 순전히 ‘나는 자원순환을 실천해야만 해’ 혹은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강박 또는 우월감에 기반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되도록이면 이런 식의 자기 비하와 반성, 다짐의 글은 피하고 싶다.

나의 부족한 현재를 비난하는 도구로서 좋은 목표를 내세우는 게 내겐 너무 오랜 습관이고, 그래서 쓰기 쉬운 글이다. 하지만 글을 완성하는 일보다 지금의 나를 바로 보고 인정하는 일이 글을 쓰는 진짜 목적임을 상기하니 어쩐지 이전 글은 너무 성급하게 나를 단정 짓는 기분이 들었다.


백수 때처럼 살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직장인이 되면 일에 소모하는 에너지가 커서 여력이 없는 게 나다. 그럼에도 어떤 날은 나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게 나다. 전자의 나를 이해하고 싶고, 후자의 나를 응원하고 싶다. 내 인생을 나답게 사는 것도, 나답게 살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것도 모두 중요하니까. 이런 내가 큰일을 해낼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이제는 그것을 조금만 부끄러워하기로 한다.

신념이 강해서 매사 흔들림 없이 실천하는 삶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이렇게 조금씩 나를 완성시키는 삶도 괜찮지 않을까. 텀블러를 챙기는 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도 말이다. 그게 진짜 ‘나를 지키는 출근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부끄러운 회사형 인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