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눈에 큰입이 딱 코모도다. 아주 천천히 웃는다. 길게 올라가는 입꼬리. 여기서 더 올라갈까? 미소는 자신 있게 더 길어진다. 올라가는 입꼬리 따라 내 눈도 점점 커진다. 차를 권하는 코모도의 목소리는 아주 낮은 저음에 매끈한 윤기가 돈다. 큰 키에 두꺼운 흉곽만 만들 수 있는 목소리.
빨간 체크셔츠에 검은 볼캡을 쓴 코모도를 따라꼭대기층으로 올라간다. 직원 둘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꾸벅 인사한다.
노란 간접 조명을 두른 공간은 눈부심 없이 환하다. 에폭시를 끼얹은 바닥은 투명해서 물 위에 떠있는 기분이다.바테이블과 높은 의자들이 긴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누군가 와주길 기다리고 있다. 술장에 잘 닦인 위스키 병들과 처음 보는 술병들이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테라스에 나가보니 동그란 전구들이 텅 빈 하늘에 만국기처럼 조르륵 걸려있다.
9층 건물의 3개 층은 호스텔로 옥상은 펍으로 운영 중이다. 호스텔은 코로나 여파로 개점휴업 상태를 3년쯤 보내다 이제 막 만실 되는 날이 생기는 중이다. 술과 간단한 안주를 만들어 파는 펍에 밴드 공연을 기획하고 싶은데, 적합한 무대일지 한번 와서 테스트해달라는 것이 우리를 이리 부른 이유다.
무대 위 조명이 켜지고 도마뱀이 빨간 네온으로 빛나자 가게 한쪽 면이 순간 여성 잡지를 펼친 듯 화려해진다. 각자 챙겨 온 악기를 꺼내 소리를 내본다.
이런 순간을 드러머는 잘 참아야 한다. 소위 사운드 체크를 위해 눈앞에 놓인 스네어나 탐, 심벌을 마구 쳐댔다가는 모두의 악기 세팅을 방해하게 된다. 스네어 드럼과 탐탐 간 거리를 맞추고 심벌의 높낮이와 각도를 조절해서 나의 평소 동선과 최대한 유사하게 만든다. 그리고 운동화 바닥의 고무 밑창을 연습용 패드 삼아 3 연음이나 4 연음을 두들기며 손목을 풀어둔다. 메트로놈이 있다면 이어폰을 낀다.
뭔가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낯선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긴장감. 오늘따라 너무 멋진 나를 향한 허영심. 손목을 푸는 동안 서서히 가라앉는다.
배꼽 앞의 스네어를 살짝 두드려서 소리 상태를 확인하고 한쌍의 작은 심벌이 겹쳐 있는 하이햇의 간격을 조절한다. 왼발을 밟은 상태로 하이햇을 두들겨 보고 엄지발가락을 살짝 들어 올려 오픈 하이햇 상태도 확인한다. 스틱으로 치자마자 뜨겁게 달군 쇠붙이를 냉수에 넣은 듯 심벌이 떨며 서로 간섭하여 끓는 소리가 난다. 맘에 든다.
많은 시간을 들여선 안된다. 나는 다른 악기를 기다려도 되지만 다른 악기를 기다리게 해선 안된다.
베이스 드럼을 튜닝할 때 울림을 줄이기 위해 이불이나 담요를 말아 넣기도 하는데, 너무 많이 들어가면 진동을 막아 울림이 다 잘려나간다. 오른발로 베이스 드럼 페달을 밟으니 텁텁하고 답답한 소리가 난다. 소리가 앞으로 뻗지 않는다.
보통 드럼 세트엔 하이햇을 제외하고 세 개의 심벌을 걸고 연주하는 데, 이곳은 크래쉬 심벌이 한 장이다. 평소 연주하던 손버릇을 유지하면 허공에 스틱을 휘두를 것이다. 동선이 꼬이지 않게 세 장 심벌의 역할을 두 장 심벌에 적절히 분배하여 연주한다.
낯선 환경에선 가장 익숙한 곡을 연주한다. 늘 듣던 소리가 재연되면 무대가 편안해진다.
무대 앞에서 유일하게 관객을 등지고 있는 스피커는 모니터 스피커다. 무대 위 연주자들의 소리를 서로 잘 들을 수 있게 하는 무전기다. 멋쟁이 기타리스트라면 모니터 스피커에 다리 하나를 올려두고 기타 솔로를 한다. 이때 정수리로 쏟아지는 핀조명. 금상첨화다.
관객을 향한 스피커는 PA스피커다. 보통 무대의 양쪽에 시커멓게 서있다. 음악을 채워야 하는 공간이 클수록 스피커의 덩치는 커진다. 천장에 매달기도 한다.
모니터 스피커와 천장에 걸린 PA의 적당한 볼륨을 확인한다. 공연장이 아니니 방음이 꼼꼼하지 않다. 공연 소리가 너무 크면 민원으로 피곤해진다.
무대 위 드럼에게 가장 큰 미덕은 차분함이다. 긴장도가 높은 연주자는 템포가 흔들리기 쉽다. 기댈 곳은 드럼이다. 여섯 곡쯤 연주하니 한 시간 가까이 지나있다.
무대에서 내려와 풀었던 악기들을 다시 챙겨 돌아갈 준비를 한다. 코모도 사장은 3월 중순에 투숙객을 위한 바비큐 파티의 짧은 공연을 제안한다. 출연료 없이 고기와 술 무한제공.
저녁메뉴를 정하고 우리는 바비큐 공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번 합주실과 공연장 대여료를 모으며 전전하기보다 공짜로 연주할 수 있는 무대라면 어디든 좋지 않을까? 고기 먹방의 흥을 돋워주는 공연도 나름 의미 있지 않을까? 파티를 즐기는 사람 중 누군가 우리의 음악을 좋아해 주지 않을까?
양꼬치를 잔뜩 시켜 숯 위에 구우며 소주와 맥주를 번갈아 따르고 양념 잘 벤 가지를 서로 덜어주다 코모도 사장이야기는 그만 뒷전이다. 술과 음식으로 뱃속이 빵빵해지니 심술보도 같이 부풀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