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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Dec 06. 2023

<돌봄과 작업>

육아 vs 자아실현? 모두가 나를 세우는 일!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 정서경, 서유미, 홍한별, 임소연, 장하원, 전유진, 박재연, 엄지혜, 이설아, 김희진, 서수연 지음, 돌고래, 2022.>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내 것을 만드는 일 사이에서 시도하고 실패하고 성장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책의 뒤표지에 있는 문구다. '실패하고'라는 문구를 제외하곤 이 책을 아주 잘 표현했다.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한 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저 수식어는 성공한 자의 겸손이다.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나는 그들의 육아 경험과 고민에 진심으로 공감하지만, 커리어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는 부러움 탓에 반쪽짜리 공감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들의 고민과 분투 속에서 전업주부와 워킹맘의 괴리감보다 진정한 돌봄에 대한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어 마음에 드는 책이다.



이제 어딘가에 선을 그을 수 있다. 아이의 성취는 내가 축하할 일이고, 아이의 실패는 내가 위로할 일일뿐이다. 아이의 성취와 실패를 나의 책임으로 내가 통제해야 할 일로 생각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것이다. 아이가 실패했을 때, 상처받았을 때, 아이를 품어주고 아이를 지켜주고 아이를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게 된다. 아이와 나 사이를 분리해야만 나는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타인이 될 수 있다. (<돌봄과 작업>,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던 기억', 홍한별, pp.73-74. 진한 글씨는 내 마음의 표현.)



일을 하기 위해 베이비시터, 조부모, 어린이집에 아이를 버린 그녀가 자신의 삶을 지켰듯 아이도 자기 삶을 스스로 떠안는 독립적 개체로 자라기 위해서는 존재의 분리가 필요하다. 아이와 엄마 사이의 분리, 그 '거리 두기'는 엄마의 커리어 유지 여부와는 별개다.



어떤 일이든 '선택의 여지'를 둔다는 것은 '거리 두기'를 마음의 기본값으로 두는 것과도 같다. '거리 두기'는 거리를 두는 대상을 지키는 동시에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한 지혜이자 중용의 미덕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내 일, 내 손에 들어오는 물건까지도 거리를 두며 관계의 지속성을 높여갈 수 있다. (<돌봄과 작업>, '사라지는 마법으로 사라지지 않기', 전유진, p.123.)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맥이 통한다. '조금은 자기 기만적일지라도 스스로와 연대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이 롤 모델이나 타인의 위로보다 도움이 되었다는 예술가 전유진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스스로와 연대하는 법,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돌봄과 작업' 사이의 줄타기에서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지혜로 다가온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돌봄과 일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찾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도달 불가능한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더 진한 농도의 정성으로 아이를 돌보고 싶은 일상적인 충동을 억누르며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일하는 법을 깨쳐간다. 걸핏하면 불쑥 고개를 들어 나를 좀먹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조하는 법도 조금씩 배워간다. 밥을 지으면서도 글을 지을 수 있음을, 돌봄의 영역 바깥에서 나를 실현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돌봄과 작업>, '여러 세계를 연결하며 살아가기', 박재연, p.146.)



여러 선택지 중에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법은 없다. 하나를 선택한들 그것에 온전히 몰입하여 뛰어난 성과를 거두기도 어렵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잘 하든 못하든,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자괴감에 빠지는 오류는 범하지 말자. 내 일을 접어두고 돌봄을 선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의 두 딸은 나와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나의 양육 목표는 여전하다. 내가 다 살아내지 못한 삶이 딸에게 부담으로 남지 않기를 바라고 딸의 인생을 내가 함부로 가져와서 살지 않기를 바란다. 어떻게 하면 우리 딸이 자기 삶을 온전히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까? 나는 아이에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특히 넘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복수하듯 아이에게 사랑을 쏟다가 아이의 삶을 훼손하는 최악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정말로 노력한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살아가면서 갈등과 충돌을 겪고 내 방식대로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상처를 받고 용서를 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딸은 옆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실수와 실패를 겪고 그것을 통과해 온전히 자기다운 모습으로 자라나리라고 믿는다. 내가 내 삶을 회피하거나 누군가에게 떠넘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내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 같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나의 딸이 둥지를 떠나 훨훨 날아가기를, 날아가다 도착한 곳에 자신의 둥지를 짓고, 자신의 창조물들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창조물들을 힘껏 키워내기를 바란다. (<돌봄과 작업>, '양육 간증 ; 나를 잃었다 찾은 이야기', 김희진, pp.203-204.)



편집자 김희진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내 삶을 내가 책임지고 그것을 온전히 살아내는 모습을 내 딸들은 지켜볼 것이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의 삶을 그들이 커가면서 이해하고 공감할 것이다. 내 딸들이 성장한 뒤 만들어낼 창조물이 돌봄의 대상이건 작업의 대상이건 간에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나를 보며 배운 것이 토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보살피고 기르는 일은 곧 나를 곧게 세우는 일과 같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겪어봐야 진실임을 아는 저 명제가 돌봄의 지혜이자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됨을 이제는 안다. 여러 저자들의 발췌한 이야기가 내 이야기의 맥락이 될 수 있을 만큼, <돌봄과 작업>은 <1982년생 김지영>처럼 이 시대, 엄마로 살아가는 자들의 공통된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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