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사이에서 '나'로 살기
<진 마모레오, 조해나 슈넬러 지음, 김희정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4.>
의료 조력 사망.
안락사에 대한 논쟁은 언제나 뜨겁다.
자살과 자연사 사이 어느 지점에서 죽을 것인가?
내 죽음에 대해 내가 가질 수 있는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흔히 스위스를 떠올리게 되는 이 죽음의 방법은 정답이 없는 어려운 문제다.
자살률이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다.
특별한 종교적 신념도 없고 굳이 오래 살고 싶지는 않지만, 낳아서 키우는 아이가 제 밥벌이를 할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할 것 같다. 때가 되면 죽기 싫어도 죽겠지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은 고사하고, 모두가 바라는 바대로 죽는 날까지 아프지 않고 살다가 잠결에 꼴깍 숨이 넘어가고 싶은 작은 소망은 있다. 그것이 소박한 바람이기 어렵다는 데서 고민은 시작된다.
고령사회, 회복 불가능하고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 우리 엄마처럼 암을 앓다가 예정된 수순대로 악화되고, 말기에 이르러 더이상 현대 의학의 기술이 개입할 수 없는 때가 되어 죽는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짧든 길든 간에 예정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엄마 살아 생전에 가장 큰 바람이었던 죽음의 모습, "딴 건 몰라도 치매는 안 걸려야 할텐데."라는 말을 떠올리면 세상 그 어떤 무서운 질병보다 인지장애로 자신을 잃어가는 마지막이 가장 두렵다는 생각도 든다.
치매든 암이든,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신체적 한계에 부딪혀 죽음 이외에 다른 것을 기대하기 힘든 이에게 생명의 유지는 과연 그 자체로 존귀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생명의 윤리가 사회와 이론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에 대한 필요조건이라면 '이대로 사는 것은 더이상 나다운 삶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의료 조력 사망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속에 용인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나의 죽음에 동의합니다>라는 책에서 발견했다. 캐나다에서 2016년부터 의료 조력 사망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시행되고 있다.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떤 고민과 법 개정이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 의료 조력 사망을 직접 시행하고 있는 연륜 있는 의사의 입을 통해 생생히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독립적인 생활이나 인지활동이 힘든 상황을 맞게 된다면 의료 조력 사망을 원한다. 이건 지금 시행되고 있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의 판단이다. 의료적 처치가 무의미한 상태가 되었을 때 단순히 생물학적 연명을 위한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 선택이 더 적극성을 가지면 의료 조력 사망도 필수적인 요건들을 충족했을 경우에 한해 가능하지 않을까?
자식, 배우자, 혹은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 같은 타인이든 간에 나 아닌 누구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은 참기 어렵다. 신체적 케어도 그럴진대, 정신적으로도 내가 나인지 모르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살아있기만 한 삶을 나는 거부하고 싶다. 인간다운 삶은 인간으로서의 품위 - 생각할 수 있는 힘과 나에 대한 존중 -을 유지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개인의 관점과 선택이다. 의료 조력 사망 제도는 엄격한 심사와 검토가 필요한 매우 민감한 사안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쉽게 논의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외국에서라도 그런 선택을 하려는 사람의 선택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는 아닐 수 있으며, 앞으로 유병장수 고령사회에서는 제도 시행과 무관하게 '사회적 돌봄' 차원에서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든다.
캐나다의 사례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신체적으로 극한의 어려움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충분한 돌봄 속에 있다면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이도 많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의료 조력 사망이 법적으로 허용된 나라에서도 통계적으로 4% 정도만 이를 신청한다니, 살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다. 그러니 제도 마련이 죽음을 부추긴다고 보기는 어렵다. 충분한 돌봄이 가능한 환경과 사회적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 조력 사망, 즉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 죽음이 충동적이거나 비관적이며 심지어 비밀스럽기까지 한 자살이 아니라 공식적이고 매우 구체적으로 준비되었으며, 무엇보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라면 나는 의료 조력 사망 제도를 지지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실현되기 요원한 제도일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 의료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도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고령사회가 되면 돌봄 사각지대에 놓이거나 외로운 사람들의 고독사가 더 많아질 것이다. 공적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만, 제도라는 것은 틈이 있기 마련이다. 비극적인 죽음을 하나라도 예방하기 위해 치료와 돌봄, 완화의료에서 한 가지 선택지를 더 늘이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 마지막 선택이 당위성을 가지기 위해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함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생명은 존귀하지만, 자신의 생명에 대해 자율적이고 책임있는 선택을 하는 것도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와 별 다를 것 없는 사회 문제가 나라마다 존재한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노인 장기 요양 시설의 취약함과 돌봄 체계의 허술함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중증 장애인이나 희귀 질환자, 중증 치매 환자와 그 돌봄을 책임지는 가족들의 고통은 더해 갈 것이다.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병 장수의 시대에, 내 생의 끝이 노화로 인한 아름다운 자연사가 될 것임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니 다양한 선택지가 필요하다. 어느 날 내가 스스로 갈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들 때, 우리나라에 합법적인 의료 조력 사망 제도가 만들어져 있기를 바란다. 내 손으로 준비하고 계획한 죽음, 또렷한 의식으로 남겨질 이들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나는 늘 '나'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