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를 보고
운명은 없다. 당신과의 순간은 모두 우연이었다. 동아리 첫 만남 때, 수수한 옷차림에도 멀대같이 큰 키 때문인지 유독 우뚝 솟은 모습에 눈길이 갔던 건 우연이었다. 동아리 엠티에서 마지막까지 우리가 남아있었던 것도, 첫 세션 이후 당신이 먼저 나에게 연락을 준 것도 우연이었다. 세션이 끝나고 늘 다함께 가던 식당에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당신과 몇 번씩 눈이 마주쳤던 건 우연이었다. 두 시간을 훌쩍 넘기던 전화와 봄날에 걸었던 벚꽃길까지, 당신과의 모든 순간은 그저 우연이었다. 혹시나 운명일까 생각하고 내심 운명이길 바랬는데 그저 우연이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한 수많은 우연들을 오래도록 곱씹고 또 곱씹었다. 혹시, 정말 혹시라도 그 수많은 우연 중에 단 하나라도 운명이 있을까 싶은 기대에 용기를 내보기도 했다. 당신과 더 이상 만날 핑계를 찾지 못해서 보지 못하게 됐을 때에도 여전히 나는 그 우연들 속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 한마디가 박혀서, 그날 그 작은 행동이 마음에 남아서 참 오래도록 그 속에 살았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난 정말 그저 우연이었다. 내가 당신과 우연을 만들어가는 시간 동안 당신은 몇 번의 이별을 했고, 그 시간 내내 나는 그저 좋은 동생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계륵이라는 걸 알았을 때에도 당신을 놓지 못했다. 참 미련하게도 당신을 놓지 못했다. 그런 당신이 새롭게 연애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연애에서 진짜 사랑을 알게 된 것 같다며,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나, 그의 운명은 따로 있었던 걸까.
우연을 운명으로 바꾼 순간은 없다. 그저 우연이 운명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만 있을 뿐. <500일의 썸머>에서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고 했던가? 천만의 말씀. 나의 썸머는 결코 나와 사귀어주지 않았다. 마음을 줬지만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신을 온전히 미워하지 못하는 건 당신을 좋아했던 그때의 내가 안쓰러워서일까, 아니면 당신에게 쏟았던 내 마음이 아까워서일까. 우연에서 끝난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바보같이 아직도 문득 당신 생각이 난다. 당신에 대한 글을 이제 더는 안 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어김없이 또 떠오르는 걸 보면 난 아마도 당신을 못 잊을 운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