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내가 살아온 시대, 이 길로가는 게정답일까

불과 몇십 년 만에 급진적인 경제 성장을 이룬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한국사람 특유의 빨리빨리 정신과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는 목표지향적인 성향이 한몫을 담당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 전반적으로 형성된 경쟁적이며 성과위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오늘날 OECD를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은 경제〮사회적 불평들을 야기했다.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의 입장으로서 나의 세대보다는 살기 좋고 나은 미래를 다음 세대에게 남겨 주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지만 사실 그 조차도 녹록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내가 살아온 세대에 대한 기대와 만족감이 있어야 후대까지도 생각할 여유를 가질 텐데 현재 학부모가 된 우리 세대,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고 규정되는 우리네 현실이 결코 희망적이라고 할 수 없는 우울한 팩트들이 사회 곳곳에서 증거로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이코노미(인플루엔셜, 2019)>에 따르면 1981년부터 1996년에 탄생한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처음으로 기존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더 불우해진 첫 번째 사례라고 한다. 즉 ‘밀레니얼 세대’ 이전까지는 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대학을 갈 수 있고, 어렵지 않게 대기업에 취직해 은퇴시점까지 회사를 다니다가 연금을 받아서 안정된 노후를 맞이하는, 그야말로 학창 시절에 배운 걸 평생을 써먹는 가성비 갑(甲)의 인생 시나리오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은행에 저축을 하기만 해도 높은 금리 덕택에 별다른 재테크나 복잡한 금융 전략 없이 안정적으로 자산을 불릴 수 있었다. 


또한 근면 성실하게 노력하면 월급만으로도 내 집 마련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소수의 맞벌이 가정도 있었지만 보통은 남편은 밖에서 일을 하고 아내는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외벌이가 일반적인 형태였고 평균적으로 자녀 두 명을 기르는 4인 가정이 흔했다. 당시에는 결혼을 하면 여성은 가정을 돌보는 것 외의 바깥 활동을 그만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고 더군다나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기회나 자기 계발 및 역량에 대한 높은 기대가 요구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그 시대의 엄마들도 자연스레 그런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빠르게 성장한 경제만큼이나 개인에게 요구되는 역할 모델이나 역량도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가정을 이룬 후, 부모로서의 역할과 한 여성으로서의 방황하는  자아를 맞닥뜨리며 이전 세대보다 더 혼란스럽고 복잡한 양상에 처하게 되었다. 이전 세대는 먹고 입을 것이 부족해 절제와 절약이 최대의 미덕이었다면, 오늘날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환경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으며 이를 넘어 욕망에 의한 소비와 트렌드를 쫓는 풍요의 시대가 되었다. 우리가 들어왔던 보릿고개 이야기나 방 한 칸에서 시작했다는 부모님의 결혼 시절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또한 높은 교육열 속에서 공부만 잘하면 성공적인 미래가 보장된다는 말을 받고 커왔기에 우리 아이들에게도 내가 받은 대로 높은 교육열을 들이대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음에도,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여전한 그 시스템과 내용들을 그대로 답습하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기존에 중시했던 사고관과 가치 등이 대체되고 새롭게 등장하는 이러한 변화의 이 시점에서 20년 전 내가 받았던 교육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를 뒤떨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학교가 추구하고 있는 공부만 잘하면 성공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 신화를 쫓으며 시험 성적을 잘 받은 순서대로 줄을 세우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갈 시점에도 토용이 될지 의문이 든다. 사회의 변화에 기민하게 움직이는 비즈니스, 마케팅 시장에서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니 고객의 취향을 반영하니 어쩌니 하며 그들의 취향을 존중하며 우리의 지갑을 열성적으로 열려고 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사회의 미래와 사회를 이끌 아이들에 관해서는 그들의 개성과 취향을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며 여러 전형을 끌어와 다양화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이 역시 아이들의 재능보다는 정보와 시간과 돈을 사용해 다른 형태의 공부를 보여달라는 요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과연 자신의 아이에 맞는 눈높이로 역량을 키워야 하는 것은 부모의 몫인 건가. 하지만 이런 가르침을 배운 적도, 뭔가를 배워서 그를 토대로 아웃풋을 만들어야 하는 시스템에서 자라온 나로서는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감지하고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 판단해도 된다는 허용치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변화가 빠른 시대를 사는 부모로서의 역할은 우리의 자질과 역량에 대한 의문점을 던지기 일쑤이고 육아가 어렵다는 푸념만을 되풀이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하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에 희미하게 감지되는 변화보다 오히려 익숙한 것에 기대서 안정감을 쫓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가 정작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 그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라곤 우리가 배웠던 교육과 가치관을 여전히 그대로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20년 전 내가 배웠던 방법과 잣대를 그대로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방법이 맞는 것일까? 아무리 시대가 빨리 변화고 하루아침에 새로운 기술과 분야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미 검증된 방법을 따라가면 뒤처지지는 않겠지라는 생각만이 유일한 내가 따를 수 있는 해법인 것만 같다. 

이전 11화 유럽 현지어 배우는 그 길은 멀고 험한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