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미국 드라마를 본다. 에피소드 한 편을 무자막, 영어자막, 한글자막으로 돌아가며 보고 있다.
영어학원에서 리더님이 한국사람들은 어휘실력은 좋은데 관용어구를 잘 모른다며 영화를 꼭 보라고 강조했다.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를 떠올려봤다. 영화는 대사가 함축적이라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 같았다.
리더님에게 회화 공부하기에 적합한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죠스'를 알려주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리더님. 현재 sky대학 중 한 곳에 출강도 나가는 분이 추천한 거라면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머릿속에선 말하는데 가슴으로는 죠스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죠스가 언제 적 영화냐. 요즘 좋은 영화도 많은데 그런 올드 무비를 굳이 봐야 된다고?
최신 영화를 좀 알려 달라고 했더니 '터미네이터 2'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추천했다.
전부 봤던 영화지만 기억나는 건 I'll be back 한 문장뿐이다. 집에 와서 디즈니 플러스에서 검색을 하니 다행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있었다.
영어자막을 켜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내가 시즌 5까지 봤던 미드 'This is us'는 말도 별로 빠르지 않고 캐릭터의 발음에 익숙해져서 그나마 잘 들렸는데 이 영화는 당체 귀에 들리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속도가 속사포처럼 빠르다. 중요한 건 그들이 말하는 걸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당연하고 자막을 읽는 속도가 말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I
시즌5까지 본 드라마. 가족드라마라 따뜻하다.
자막을 읽어도 해석이 안 된다. 상황과 하나도 안 맞는 단어들의 나열. 모르는 단어가 없어도 해석이 되지 않았다. 영화를 많이 봐서 관용어구를 익히고 실제 회화감을 익히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20분 정도 참고 보다가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다시 영화를 켰다.
이번에는 이해가 안 되면 바로 돌려보기를 했다. 영어자막을 보고 이해가 안 되면 한글 자막으로. 문제는 의역을 하다 보니 한글자막을 봐도 영어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문장이 많았다. 휴대폰으로 사전을 켜고 단어를 찾기 시작했다.
모르는 단어가 없어도 문맥이 안 맞는 건 전부 관용어구였다.
예를 들자면 이런 문장이다
drink the Kool-Aid는 신봉하다.
have big shoes to fill은 전임자가 세운 높은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
beat somebody to the punch ~ 보다 먼저 선수를 치다
drink는 마시다와 전혀 상관없는 뜻이니 자막을 보면서도 해석이 안된 것이다. 우리말에도
'간이 부었네', '오리발 내밀지 마' 같은 표현을 생각하면 같은 맥락이다. 단어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문장인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표현들.
책이나 유튜브 쇼츠로 지나가며 배운 표현은 금방 까먹게 되는데 영화 속에서 배우니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제발 그랬으면.
그렇게 표현과 단어를 일일이 찾아가며 모든 문장을 분석하고 영어와 한글자막으로 시청했다. 이렇게 말하니 뭐 대단한 걸 한 것 같은데 그냥 영화 한 편을 자막을 바꿔가며 3시간 동안 봤다.
다음 날 다시 영어 자막을 켜고 대화에 집중했다. 단어 몇 개만 들린다. 여전히 속도가 빨라서 문장이 날아다닌다. 특히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을 연기한 메릴 스트립(미란다 역)은 저 대사를 외운 게 경이로울 정도로 숨도 쉬지 않고 문장을 쏟아낸다. 세계 최고의 패션 잡지 편집장 캐릭터라 그런지 말이 정말 빠르다.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미란다 역의 모델이라고 한다.
샤넬 디자이너 라거펠트와 미란다의 실제 모델 안나 윈투어
한국에서 만나는 원어민들은 우리를 배려해 비교적 천천히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가끔 리스닝이 잘된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들이 말하길 자신들은 대부분 초등학생 영어 학원에 근무하기 때문에 천천히 말하는데 익숙해졌고 고급 어휘나 관용표현은 쓸 일이 없어서 생각이 잘 안 난다고 했다. 가끔 본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왜 그렇게 말을 느리게 또박또박하냐고 놀림을 받는다고.
배려가 묻은 영어만 듣다가 영화를 보고 나니 충격을 받은 것처럼 잠이 확 깼다. 내가 익숙해있던 속도는 진짜 원어민의 회화속도가 아니었던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얼마 전 남편이 최근 나온 갤럭시 24에 AI 통역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전화 통화 중 실시간 통역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대뜸 영어를 왜 배우냐고. 이젠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왔다며 당당하게 영어를 배우지 않는다.
그 말도 맞긴 하는데, 외국인을 만나서 사람을 앞에 두고 기계에다 얘기하고 기계음을 들으면 그게 뭔가. 나는 앞에 있는 사람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에게 얘기하고 싶은데.
그것보다 사실 취미로 한다.
조금 빡센 취미.
아침에도 플랭크를 하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틀어놨다. 저 빠른 수다에는 언제 익숙해질까. 영어로 봐도 멋있는 메릴 스트립의 연기에 감탄하며 그녀의 명대사 " That's all." 이 자꾸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