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딸의 말에 덜컥 걱정이 앞선다. 나중에 화가가 되었지만 자신의 재능이 남다르지 않다고 좌절하면 어쩌나? 재능은 뛰어나더라도 동시대인들의 기호에 호소하지 못하고 시대를 앞서가면 외로움이 클 텐데? 우리 딸은 7살이다.
아내는 ‘화가가 되려면 우선 내면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책과 음악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 아내는 그림을 잘 그린다. 중학교 때까지 미술학원을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새로운 친구가 학원을 함께 다니기 시작했는데,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이 ‘미술을 전공할 생각이 없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때, 아내는 ‘내가 미술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 아내는 늦은 나이에 전공을 한번 바꾸어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되었다. 유리 멘탈인 나와는 달리 아내는 강철 멘탈이다. 하지만 미술을 좋아하던 ‘중학생 아내’에게 그 당시의 기억은 다소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아내는 그 당시 감정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었으나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나름의 좌절이 있었으리라. 강렬한 감정이 묻어 있는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바라셨던 것처럼 나도 딸이 ‘등 따시고, 배부르기’만을 바라나 보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너무 곱게 키우셨다. 대학교 때 스웨덴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교환학생을 갔던 계기도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다. 사귀던 여자 친구가 미국 교환학생을 준비했는데, 나는 당시 카투사를 지원하려 토익 성적을 갖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교환학생을 다녀 올 동안 군대를 다녀오려는 심산이었다. 불운하게도 내가 지원한 해부터 성적순이 아닌 추첨방식으로 바뀌어 탈락하고 말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도 교환학생에 지원했다. 영어성적이 월등하진 않아서 경쟁이 덜한 스웨덴에 지원했고, 여자 친구는 미국을 지원했다. 나만 붙었다.
여자 친구는 처음에는 서운해했으나 다녀오라고 했다. 스웨덴과 스위스도 잘 구분하지 못하던 나는 스웨덴으로 떠났다. 나의 스웨덴 생활은 그 나라의 겨울과 같았다. 백야가 있는 여름과는 달리 오후 3시면 해가 지기 시작했다. 처음 하는 자립 생활, 최강 내향성, 영어 울렁증의 세 가지는 시너지를 이루어 생활을 힘들게 했다. 부모님께 배운 것은 절약정신 밖에 없었다. 스스로 만든 ‘극한 생존 상황’에서 미련하게 아끼고 살았다. 생필품은 기숙사 내에 있는 슈퍼가 아닌 대형할인점에 고물 자전거를 타고 가서 사 왔다. 휴대전화는 그 당시에는 사치품으로 생각되어 구입하지 않아 나를 더 고립되게 만들었다.
스웨덴 생활이 6개월쯤 지났고 한 겨울이었다. 여느 때처럼 공중전화로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여자 친구 왈 영어성적을 올려서 미국 교환학생에 선발되었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한국의 6월쯤에 떠난다고 했다. 여자 친구와 2년을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믿어지지 않음’이긴 하다..)
결국 스웨덴의 겨울, 지극한 내향성, 여자 친구의 단호함이 시너지를 이루어 부적응 증세를 나타냈다. (드디어 곱게 키우신 부모님이 등장한다.) 부모님은 그렇게 힘들다면 교환학생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난 아들이 없지만, 내 아들이 그랬다면 혼을 내서 잘 적응하고 더 즐기다가 오라고 할 것 같다.
결국 스웨덴 교환학생 생활은 6개월 만에 끝났다. 하지만 여자 친구와의 관계는 해피 앤딩이 아니었다. 미국 교환학생을 떠난 여자 친구는 적응을 너무 잘한 나머지 네덜란드 남자 친구가 생겼다. 그 당시 대학원 준비를 하던 4학년이었는데, 함께 준비를 하던 동기들이 나의 방황 때문에 꽤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이야기가 너무 벗어난 것 같다. 우리 딸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