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수련의 끝이 보이는 말턴, 그런데 왜 화가날까
2024년 청룡의 해가 밝아왔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삼삼오오 모여서 어디론가 떠났다.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이 제야의 종을 울리는 걸 보기 위해 보신각으로
일출 명소로 유명한 정동진, 성산 일출봉으로
그것도 아니면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서 산봉우리 사이로 해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모습을 보기도 할 터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꽤나 좋아한다.
새해에는 해돋이를 보고, 떡국을 먹으며 신년 맞이 계획을 세우는 것
이런 행위들을 통해 새마음 새 뜻을 가슴에 새기며 다시 일 년을 시작할 기운을 얻는 것
나는 이런 종류의 것들을 '낭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1월 1일부터 당직 근무가 있는 바람에 새해 첫날 특유의 활기 참의 흔적조차 느껴 지 않는 새까만 새벽어둠을 헤치고 병원으로 향해야만 했다.
나의 새해 1월 1일은 당직 근무로 시작되었지만 크리스마스도, 추석도, 설도 모두 병원에서 보냈기에 거부감은 없었다.
그저 조금 아쉽다는 정도?
대신 출근길을 무겁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래 공휴일이나 주말 당직은 인턴 둘이 배정된다.
모든 병원에서 그렇듯 우리 병원도 내과 환자가 제일 많다.
적어도 당직 인턴이 두 명은 있어야 그나마 할 수 있을 만큼 일이 있는데, 오늘의 당직 인턴은 나 혼자였다.
전공의 보호법 그리고 동기들의 휴가 일정을 고려하여 이리저리 스케줄을 짜보았지만 나 혼자 당직을 서는 것 이외에는 가능한 스케줄이 없었다.
수련교육부에 문의도 해보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는 답이 들려올 뿐이었다.
억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지난 10개월 동안 쌓인 내공으로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각오를 다지며 버티면 새해맞이 출근을 했다.
오전 6시가 되기 10분 전부터 스멀스멀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니 오전 6시가 되는 순간 휴대폰이 부리나케 울리기 시작했다.
10분 만에 해결해야 하는 업무가 30개 쌓였다.
숨이 턱 막혀서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0개월 동안 나름의 경험과 내공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거대한 업무의 파도 앞에서 나는 한낱 인턴일 뿐이었다.
심지어 중환자실에 해야 할 정규일은 연락도 오지 않은 상황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찔했다.
인턴의 제1법칙. 급한 일 빨리 처리하기
그런데 급하다고 하는 병동이 4개다.
빨리 와달라고 해도 몸이 하나라 갈 수가 없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당장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다.
어찌어찌 급한 병동 일을 끝내고,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물론 급하지는 않지만 오전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인턴이 해야 할 업무들이 적혀있는 표를 보았다
중환자실 안에서만 찍어야 할 EKG가 15개, ABGA가 10개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아무리 빨리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 시간 안에 중환자실을 벗어날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표에 적혀있는 일을 하는 와중에 생길 또 다른 중환자실 일들, 처방 업무들, 이미 쌓여있는 다른 병동의 업무들, 그리고 중간중간 어쩔 수 없이 달려가서 해결해야 할 응급 업무들
머릿속에 정리조차 되지 않는 오늘의 하루에 들숨에 짜증 한번 날숨에 한숨 한 번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 순간 믿기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동기들이 보였다.
아니 후광이 너무 눈이 부셔서 보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존재를 느꼈을 뿐이다.
전날 오전 7시부터 오늘 오전 7시까지, 총 24시간의 응급실 근무를 끝내고 잠을 자는 것 대신에 나를 도와주는 걸 선택한 피부과 0년 차
지난밤 흉부외과, 신경과, 비뇨 의학과를 홀로 책임지며 고군분투를 하고도 나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준 외과 0년 차
그들은 졸음을 참아가며 심전도를 찍어야 할 환자들의 명찰을 본인의 왼팔에 붙여놓고 심전도 기계를 끌고 다녀주었다.
ABGA 바늘을 주머니에 한 움큼 쑤셔 넣고 수개월 동안 연마한 실력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채혈을 끝내버리는 우리 동기들동기들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당직하는 동안 적어도 한번은 폭발했을 것이다.
인턴을 하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는 화가 없는 편이 아니다.
그동안 이해심으로 가장한 자기 세뇌로 화를 꾹꾹 눌러왔었지만 사실은 나의 내면에는 불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름 스트레스를 견디는 능력이 높다고 생각해왔고, 긍정적인 태도가 내 강점이라고 생각해왔거늘
내과 당직 첫날부터 짜증과 울분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스스로를 보게 되었다.
내가 나를 몰랐던 것일까?
인턴 평가가 모두 끝난 지금이 원래 나의 본모습이 아닐까?
아직 인턴 평가가 진행되고 있을 때는 내가 120%의 일을 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하는 만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란 믿음에 이러한 일들이 있어도 이 정도까지 짜증이 치밀어 오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도 이 상황은 분명 이렇게까지 화날 일은 아니다.
나는 왜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병동에서 급하지도 않은 일로 푸시를 한 것도 아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나에게 짜증을 낸 것도 아니다.
환자나 보호자분들이 무례한 태도를 보였거나, 막무가내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나를 화나게 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나의 성향 때문이겠지.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통제하는 걸 좋아한다. 좋아하는 걸 넘어서서 그래야만 마음이 편하다.
나는 MBTI 검사 결과 J가 99%, P가 1%로 나올 정도로 계획적이고 통제적인 사람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발생하는 상황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이 많던 적던, 바쁘던 여유롭던 늘 상황을 내 통제하에 두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사람
일에서는 완벽, 아니 완벽의 가까움을 추구하고 일을 잘해야 한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
일에 있어서는 못할 수도 있지라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에게 잣대가 엄격하고 다소 꼰대스러운 사람
그런 사람이 나다.
굳이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혼자서 사서 받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이 정도로 이렇게까지 화가 난다면 성형외과 1년 차 때는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앞으로 남은 2개월의 말던 기간 동안 해결 방안을 고안해 보아야겠다.
이렇게 또 나를 좀 더 알아간다.